눈부신 날들이 지나간다

아카시아 숲 너머로 눈부신 날들이 지나간다. 오월의 햇볕이 계란 꽃의 빛깔을 순백으로 바꿔놓고 하늘을 끌어내려 다가올 더위를 예감케 한다. 계절의 여왕이라 했던가. 곳곳에서 피어나는 하나님의 솜씨에 마음이 싱그럽다.

비온 다음날 오월의 바람은 우울했던 것들을 한숨에 날려버린다. 그 바람에 모든 것을 맡기고 춤추는 나뭇잎은 보기만 해도 후련하다. 언젠가 젊은 시절 호숫가 풀밭에 누워 흰 구름들이 파란 호수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게 너무 신비롭고 아름다워 그 호수 구름 속으로 뛰어들어 녹아버려도 좋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드디어 기회를 보아 실제로 호수에 몸을 던졌다. 첨벙거리는 나로 인해 호수는 정적을 잃었고 나는 구름을 잃었다. 속상해 벌렁 몸을 누이는 순간 더 하얀 구름이 바로 위에 있었다. 한참을 그대로 둥둥 떠 다녔다. 물위의 나도 하늘의 구름도 바람결 따라 지나갔다. 어느 날 밤엔 먼 강가까지 오래도록 걷기도 했다. 젊음의 열기가 밤안개에 식을 때까지. 그런 날들이 이젠 다 지나갔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즐거움도 아픔들도 다 지나간다. 아쉬움도 서운함도 지나가고 고통도 상처도 다 지나간다. 산다는 것은 그저 저 나무들처럼 그냥 서서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꿋꿋이 견뎌내는 것이다. 더위도 추위도 찬사도 모욕도.

물속에 뛰어든다고 구름을 잡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앉아만 있다고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을 향한, 주님을 향한 갈망이 있는가. 그 갈망을 품고 견디며 참고 있는가. 그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목적지를 향해 포기 없이 계속해서 걷고 있는가이다.

어느 날은 설렘으로 잠 못 이루고, 어느 날은 속상함으로 참혹해져도 거룩한 목적을 향해 한걸음 두 걸음씩 걷는 이들이 저 푸른 나무와 같다. 계속적인 육의 고통, 영의 곤고함 속에도 주님이 하신 약속을 굳게 잡고 위에서 부른 부름의 상을 위하여, 주님과의 합일의 꿈을 간직한 채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가야할 자리까지 가는 이들은 저 뿌리 깊은 나무와 같다. 어느 날 가지 몇 개가 부러져도 견디고, 엄청난 폭풍으로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버려도 다시금 죽은 것 같은 흙무더기 속에서 새가지를 내는 나무는 끝없이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든다, 가지를 뻗는다. 이것만이 소망 있는 현실이다. 그 외에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다.

바람이 불면 향기가 흩날린다. 사방으로 소망이 퍼져간다. 주님 향한 갈망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떠나보내는 이들의 향기다. 합일의 꿈을 제외하고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는 이들의 소망이다.

다 지나간다. 젊음도, 건강도, 인생의 즐거움도, 놓치기 싫은 감격도, 기쁨도, 잊혀지지 않는 억울함도, 서운함도 다 지나간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90:10).

가엾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을 향해 더욱 힘쓰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사랑의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품자. 그것만이 가치롭다. 그것만이 영원하다.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나도 바람 사이로 지나간다.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