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청종하면 너희가 살리라

11.jpg최근 우리나라를 방문한 포이드레스 미국 웨스트민스트 신학교 교수는 한국교회를 향한 의미 있는 충고를 하였다. 그것은 돈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기중심적 사상이 팽배하다는 것이다. 성경에도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임을 알면서 크게 외치는 이는 매우 적은 현실이다.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한국교회는 자기 행복만을 추구하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너무나 많다고 지적했다.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두는 신앙을 강조하면서 중심에 하나님을 두지 않으면 하나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고 헤어 나올 수 없는 영적 함정과 불행에 빠져들게 된다고 말했다.

중심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그 담겨진 그 무엇에 의해 인생은 흘러가기 때문이다. 마음에 세상을 담고 있으면 세속적인 삶을 살게 되고, 반면에 주님을 담고 있으면 주님을 좇아 살게 마련이다.

포이드레스 교수의 말대로 지금 한국교회의 중심에는 물질과 탐욕이 자리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너는 마음의 중심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 답할 것인가?

맘몬이 하나님을 대체하는 현상이 깊어지면서 물질 앞에서 너무 쉽게 타협을 한다. 물질의 복만 받을 수 있다면, 출세와 성공만 보장된다면 불의도 용납하는 게 현실이다.

이렇게 신앙적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음에 하나님을 담아야 하는 신앙의 목표를 상실한 현대 교회는 딜레마에 빠졌다. 복음의 핵심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8:29) 즉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익은 열매가 되는 것(4:26-29), 성화(聖化)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신앙의 목표를 상실한 채 이 세상의 육적인 축복만 추구하다가 앉은뱅이가 되어버렸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죄에서 해방되어(8:2), 이제 하나님의 생명을 얻어 성화 즉 의인이 되었다면, 우리의 생활인격 속에서 생명에 이르는 냄새’(고후2:16)가 나야 하리라. 겸손, 온유, 사랑, 인내, 절제, 자비, 충성, 화평 등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오히려 기회가 주어지면 교만, 음란, 아집, 포악, 질투, 거짓, 태만 등 죄의 악취를 풍길 때가 얼마나 많은가. 순간순간 육적인 애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하고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는 가련한 꼴이다 


성화의 복음

성경은 분명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고 협착한 길을 다 걸어가야만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셨다(7:13-14). 그렇다면 아직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교회가 신앙의 목표를 상실하고 세속화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성화의 복음을 상실한 채 번영과 축복의 복음에만 도취되어 있는 현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확실하게 증거 하지 못하고 있다. 자칫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교인들이 떠날까 눈치를 보며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기복주의·물질만능주의·성장주의에 오염된 말씀과 신앙 가지고는 교회갱신과 영성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 우리 속에 하나님을 담으려면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맑은 물이 충만했던 초대교회의 영성이 필요하다. 초대교회는 12사도들과 교부들, 그리고 그 계보를 잇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생명의 말씀이 가득 차게 하셨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기복주의·물량주의·믿음만능주의라는 흐린 물에 겨우 연명하던 터라 그 한계를 드러낸 지 오래다. 이제는 번영과 기복신앙을 버리고 회개와 영적 각성을 통해 흙탕물을 들어내고, 순수한 무교병의 진리와 성령의 맑은 물로 다시 채워야 한다.

그 답은 신앙의 근본인 말씀 속에 있다. “내 백성이 나를 청종하며 이스라엘이 내 도 행하기를 원하노라”(81:13). 하나님은 나를 청종하라고 말씀하셨다. 성도들의 모형이라 할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애굽(죄악 세상)에서 노예생활 하다가 모세의 인도를 받아 출애굽(구원받음)하여 가나안(천국)에 들어갔던 광야 40년 여정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걸어가야 했던 광야는 그야말로 하나님을 청종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곳이었다. 광야는 문명의 이기가 아무것도 없는 곳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종 애굽(죄악 세상)이 생각난다고 하며 원망 불평을 하였고,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시고 회개하면 새롭게 하셨다. 왜냐하면 그런 생활인격을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모형적인 이치를 오늘날에도 똑같이 적용하여 우리를 이 세상 광야에서 훈련을 시키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8:2).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와 같이 범죄하기 쉬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훈련 즉 연단을 받도록 하셨던 것이다. 척박한 광야에는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직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야만 살아갈 수 있는 곳이다. 거기는 볼 것, 재미난 것, 인간적으로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여 빨리 거기를 벗어나는 길밖에 없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광야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지할 것, 즐길 것이 아무 것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의지할 것, 즐길 것, 재미난 것이 너무 많다.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너무 많다. 스마트 폰이 놀아달라고 하고, TV나 영화가 나를 부르고, 친구들과 부모 형제들이 내 발목을 붙잡고, 의식주 문제가 나를 옭아맨다.

이 속에서 어찌 하나님을 담을 수가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육적인 것, 천국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이기에 물리쳐야 하고 극복해야 하는 대상들이다. 이것 때문에 범죄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고 원수가 된다. 우리 속에 이러한 것들을 담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오로지 하나님만 담기 위해 하나님께만 청종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는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광야에 있다. 오늘날 광야교회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리라!”

이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