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펄 끓는 지난여름, 전주 선교대회를 다녀왔다. 기온만큼 젊음의 열기와 패기가 넘치는 청년들 사이에서 나이 많은 장년 세대가 참석하는 게 조금은 쑥스러웠지만, 하나님이 행하실 기대를 안고 대회장에 들어섰다. 김제 만경 선교센터 대강당에 “ALL IN ALL”(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신 그리스도께 올인하라)이라는 주제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첫째 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대위임령에 응답하여 90세의 고령의 나이에도 여전히 말씀을 선포하시는 이동휘 목사님의 뜨거운 열정과 헌신이 냉랭한 내 가슴에 조금씩 불을 지폈다. 둘째 날 선택 강의 시간에는 일본 나고야에서 선교하시다가 지금은 남호주 아들레이드에서 해외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하시는 J선교사님과의 만남을 가졌다. “헌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나눔을 가졌는데, 선교사님은 ‘헌신’은 눈에 보이는 무슨 업적이나 성과가 아니고 ‘주님과의 관계’라고 정의를 내리셨다. 헌신은 하나님과 얼마나 교통하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관계를 잘 맺고 있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셋째 날에는 가나의 M선교사님을 만났다. 자녀뿐만 아니라 자신도 17번이나 말라리아에 걸려 손마디나 온몸이 바늘로 쿡쿡 찌르는 큰 고통과 생사가 오가는 시련 속에서 잠시 선교지를 떠나 선교사들을 훈련하는 필리핀 센터에서 헌신하셨다. “저 아프리카에는 굶어 죽어가는 영혼들이 수십만입니다.”라는 한 목사님의 외침에 M선교사님의 가슴에 다시 불이 지펴졌고, “가나로 가고 싶습니다. 그곳으로 다시 발령을 내려주십시오”라며 가나 영혼들을 향한 애끓는 마음이 다시 척박한 선교지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였다. 

한 번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차량이 드문 지역이라 현지인 여성들을 태웠는데 생선 썩는 냄새보다 더 강한 악취가 났다. 냄새가 너무나 독하고 역겨워 구토 증상까지 일어나자 M선교사님은 순간 원망 불평이 올라왔다. ‘내가 왜 이곳 가나로 돌아왔던가?’라는 사역에 대한 회의와 자신에 대한 비관도 일어났다. 그렇게 온갖 불평을 쏟아놓는데, ‘나는 죄로 뒤덮여 악취나는 너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렸노라’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에 갑자기 눈물이 계속 쏟아져 내렸다. 자신의 눈물로 인해 운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면서 선교사라고 하지만 자신은 이렇게 연약한 존재라고 고백하시며 다시 눈시울을 붉히셨다. 자신은 주님의 도우심이 절대로 필요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 외에도 선교 현장에서 사람이나 어떤 사건에 부딪힐 때마다 내면의 싸움을 하시는 선교사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쓰러지고 넘어질 때마다 주님을 놓치지 않으려는 M선교사님의 영적 투쟁의 현장들을 들으면서 헌신에 진정한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약 30년 여년이라는 세월 동안 문서 사역,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섬기고, 말씀을 전하면서 부족하지만, 헌신해 왔다고 여겼다. 그런데 지난 삶을 돌아보니,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일을 하면 ‘내가 더 연장자인데, 이런 일을 언제까지 내가 해야 하지?’라는 마음에 불평이 일어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말 힘든 일을 감당하고 계시네요.” 이 한마디를 듣지 못해 섭섭한 마음에 원망의 화살을 쏘기도 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한다고 했지만, 주님과 상관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렸다. 주님과의 관계는 소원한 채 이 일, 저 일로 분주하게 뛰어다니면서 하나님께 헌신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마르다처럼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나는 일하는데 저 사람은 이 일에 너무 무관심한 것’ 같다며 내 일의 분량과 헌신이 마치 비례하는 듯 은근슬쩍 나를 앞세웠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쉽게 지치게 되고, 그 일은 주님의 일이 아닌 내 일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더는 헌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내 업적을 보시는 게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을 달아보신다. 어떤 일을 하느냐, 얼마나 성과를 거두었느냐, 사람들이 얼마나 인정해주느냐가 아니다. 주님의 관계를 놓치지 않아야 진정한 헌신이다. 

모세가 위대한 선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능력과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였다. 그는 한시도 여호와 하나님과 떨어지지 않았다. “모세 같은 예언자가 다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던 사람이다”(신34:10). 능력과 권세는 하늘로부터 임하는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주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쓰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가면 된다. 우리가 주님을 꼭 붙들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모든 장벽과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헌신을 할 수 있다. 

‘청소년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돈 보스코의 어머니 마르가리타는 오라토리오의 어머니로서 오랫동안 음식과 세탁 봉사를 하셨다. 1850년 어느 날, 그동안 참고 있던 불평과 불만을 아들에게 털어놨다. 

“요한! 이제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죽도록 고생했지만, 보답은커녕 누구 하나 알아주지도 않는구나. 아이들은 걸핏하면 밭에 들어가 채소들을 짓밟아 놓고 널어놓은 빨래를 떨어뜨려 흙투성이로 만들질 않나, 옷은 하루가 멀다하고 빨아야 하고 서랍에 넣어둔 셔츠를 말도 없이 가져간단 말이야. 이제 도저히 안 되겠다. 요한! 나, 베키의 집으로 가야겠어. 이젠 나도 여생을 조용히 지내고 싶구나.”

돈보스코는 아무 대꾸도 않고 어머니를 보다가 벽에 걸린 십자가로 눈길을 돌렸다. 어머니도 십자가를 쳐다보았다. 주름진 어머니의 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 네가 옳다.” 그러곤 다시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으로 갔다. 돈보스코는 회상록에서 말한다. “그 후 어머니는 한 번도 불평하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첫사랑이나 뜨거운 열정과 열심이 식는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주님이 맡겨 주신 일에 하나님 중심으로 헌신하려면 주님과의 관계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다른 어느 것이 아닌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집중해야 한다. 

어느 소년이 목수와 함께 지내면서 못 박는 일을 배웠는데, 소년은 시간이 지나도 목수처럼 못을 정확하게 박지를 못했다. 그러자 목수는 소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꼬마야, 너는 못을 박을 때 네 손과 못을 동시에 같이 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손은 안 보고 못만 보고 박는다.” 예수님이 내 초점에서 사라지고 하나님과 관계가 소원해지면 너무 쉽게 상처받고 넘어진다. 어떤 문제가 갈등이 일어날 때도 아내, 자식, 남편, 주변의 사람과 환경을 보지 말고 예수님께만 초점을 맞추면 해답이 보인다. 

헬라의 어느 왕이 궁의 보석, 토지, 건물, 의복 모두를 나누어 주었다. 한 궁녀만은 원하는 것이 없었다.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왕이 물었더니 “나는 임금님 자신을 원합니다.” 했다. 왕은 그녀를 왕비로 택했다.

일의 성과나 대가나 보상이나 칭찬이 아닌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다. 다른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이다. 더 빛나게, 거룩하게, 진실하게 살고 싶다면 주님을 꼭 붙들어야 한다.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신 주님께만 올인(ALL IN ALL)하는 사람이, 주님과의 사귐이 끊어지지 않는 사람만이 진정한 헌신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