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사랑 결국 사랑!

교활한 몸놀림으로 성만찬 성배까지도 감히 꿀꺽 들이키는 파렴치한 가룟 유다를 상상해 본다. 제자에게 배신당하여 생살 후비는 아픔에 짓눌림 당하면서도, 마지막 밤, 두 발을 덥석 쥐신 예수님은 선량한 다른 제자들에게처럼 무릎을 꿇고 눈물로 씻으신다. 이 물로라도 네 죄를 씻는다면 좋으련만 하시는 듯 사랑으로 깔끔히 마무리하시므로 그와의 마지막을 수놓으셨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는 말씀을 어김없이 이루심이었다. 얼굴에 침 뱉으며 야멸차게 쏘아붙이는 파렴치한 군주에게도, 수건 씌워 뺨 때리는 비열한 인간들에게도, 창으로 옆구리 쑤시는 잔인한 로마병정에게 치욕으로 배 불리시는(애3:30) 순간까지도, 천벌 받으라며 분노로 맞서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라는 간곡한 기도를 드리시므로 패배자처럼 최후를 끝내셨다.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는 나치 기간과 공산 치하에서 14년동안 감옥생활을 겪었다. 어느 날 자기를 체포한 비밀경찰이 그 감방에 투옥되어 들어왔다. 놀라서 그 이유를 물었다. “비밀경찰인 나는 많은 기독교인을 감옥으로 보냈지요. 어느 날 열두 살 어린 소녀가 세 송이의 꽃을 내게 가져왔기에 웬 꽃이냐 물었지요. 저는 어머니 생일 때마다 꽃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대령님이 우리 어머니를 데려가셨기 때문에 더 이상 선물을 드릴 수가 없어서 꽃을 대령님께 가져왔어요. 대령님, 이 꽃을 사모님께 갖다 드리세요.”

소녀의 순박한 사랑에 굴복된 그는 즉시 주님의 품에 안겼고 고난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행인의 옷을 벗기는 시합에서 세찬 바람은 실패했으나 따뜻한 햇볕이 승리했다는 우화는 달콤한 사랑만세 교훈이다. 반면에 꼿꼿한 자존심을 꺾지 못해 울컥울컥 보복 심리로 기울고 있는 꾀죄죄한 자신을 발견한다. 감정을 풀었다 말하면서도 틈만 있으면 미해결된 감정이 속속 불거져 뭇 가슴에 못질하는 궁상맞은 우리 모습을 보게 된다. 성령 충만이 곧장 성질 충만으로 바뀌고, 들쑥날쑥 고르지 못한 사울왕의 감정처럼 평정을 잃은 채 영혼의 칭얼거림에 시달리고 있는 가련한 자화상을 본다. 내 가슴 시린 것만 외골수로 생각하고 편협한 인생길을 걷기로 굳어진 사람만 같다.

새 영을 주며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겔11:19) 했는데 새 영을 받지 못해서 그럴까. 사랑의 안경을 쓰고 보면 잘난 체하는 사람도 참 똑똑해 보이고, 미련한 사람도 듬직하게 보인다는데 사랑의 안경을 아직도 구하지 못해서일까.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사53장).

고난의 종 예수님처럼 못생겼으면 좋겠다. 저질스럽게 이기기보다는 멋지게 졌으면 좋겠다. 왕창 죽었으면 좋겠다. 왕년에 순결치 않은 사람 누구냐. 십자가에 한번쯤은 죽지 않은 사람 누군가. 왜 한번인가. 그것도 잠시의 실신상태는 아니었던가. 한번 죽었다는 공로로 기어코 영예를 얻어야만 되겠는가. 애매한 누명 쓰시고 치욕의 십자가 짊어지셨지만, 막판까지 사랑만 하신 주님의 꾸준한 사랑에 깊숙이 침몰당하고 싶다.

이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