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信念)보다 뜨거운 신념(神炎)

지난 10월 10일, 서울 여의도의 한 호텔에서 97년 탈북하여 망명했다가 3년 전 별세한 고(古) 황장엽 전 비서의 3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식순에 기도 요청을 받은 목사님이 초대장을 주어서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외부인사들을 초청하는 추도식으로는 마지막이라면서, 권영해 전 국정원장, 이인제 국회의원 등 사회 저명인사들을 초청하여 추도식을 진행하였다.

고 황장엽 선생에 관하여 자세히 알지는 못하고, 다만 귀동냥으로 북한 최고위급 중 한 명이 망명하여 정치적, 군사적으로 굉장한 긴장이 유발됐다는 것, 덕분에 북한에 관한 고급 정보들을 얻어내게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탈북과 망명을 결심하기까지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신념을 위한 희생의 대가는 알지 못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독재정권의 유지를 위하여 일익을 담당했던 사상 교육자였던 그는 철학자의 양심으로 더 이상 허위와 기만으로 얼룩진 주체사상의 나팔수가 될 수 없다고 결심하고 오랜 준비와 망설임 끝에 망명을 하였던 것이다. 그저 북한 정권이 원하는 대로 계속 그 길을 갔더라면 누릴 수 있었던 부귀영화를 포기해야 했고, 망명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가족들 모두 사형 당하는 아픔들을 감수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라 하겠는가.

그가 전달받지 못할 아내에게 유언으로 남긴 한 마디가 다음과 같다.

“나 개인의 생명보다는 가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고, 가족의 생명보다는 민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며, 한 민족의 생명보다는 전 인류의 생명이 더 귀중하다는 내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만 알아주기 바라오.”

자유와 민주를 찾아, 또한 그것이 북한에도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염원으로 남한으로 넘어왔건만 1997년 망명 이후 2010년 사망할 때까지 그의 생활은 속박과 감시의 생활이었다. 오죽하면 사는 동네 골목을 남의 시선 의식하지 않고 100미터만이라도 걸어봤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했을까. 고 황장엽 선생은 사후에도 북한에서 배우고 남한으로 넘어온 많은 제자들과 탈북자들, 그의 지인들, 그리고 그의 사상과 희생의 삶을 높이 산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었다.

숨을 거두기 얼마 전 수양딸로 삼은 김숙향 씨의 전도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돌아가셨다 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자신이 믿고 추구하는 가치와 신념을 위해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하다 고백한 가족들의 생명을 희생한 것이다. 신앙이 아닌 신념도 그렇게 대단한 결단을 끌어낸다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은 그보다 더 뜨겁고 열정적이고 과감해야하지 않겠는가. 부끄러웠다. 사도 바울이 달려간 그 길을 이방인이었던 사람이 갈 수 있었다면 우리는 더욱 그리 해야 하지 않는가 하고 말이다. 신념보다 못한 신앙. 과연 참된 신앙이라 할 수 있을지.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둘로 귀결된다고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고 이 새 계명도 ‘사랑’이란 한 단어로 집약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사랑에 목숨 건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과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목숨을 걸고 있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목숨을 걸고 있는가. 하나님을 향한 불꽃같은 사랑(神炎)의 증거가 있는가.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벧전1:22).

사랑 때문에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고(고전13:3), 생명을 관제와 같이 부어주고(딤후4:6) 죽음의 자리까지(계12:11) 나아가는 것을 주님이 요구하고 계시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신념만으로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는데, 그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위해 헌신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제2의 바울이 탄생하였으리라. 이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다가온다. 안정적이고 편안한 신앙생활만을 유지하려는 사람은 그때를 대비하지도, 염두에 두지도 않을 것이다.

고 황장엽 선생처럼 의의 길이라고 믿는 것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만이 그때에 빛을 발할 것이다. 속으로 묻는다. ‘나는 준비되고 있는가? 아니, 그런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라도 있는가?’ 자신 있게 대답할 용기가 없다. 무뎌졌다. 녹슬었다. 무뎌지고 녹슨 칼은 다시 제련되어야 한다. 풀무에 다시 들어가 뜨거움과 차가움을 경험하며 다시 날을 갈고 제 빛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은 지켜보고 계시다. 스스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을. 목적지를 잊어버린 순례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현실에 안주하며 머물기를 원하는 사람은 더 이상 나그네가 아니다. 나를 붙잡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가족, 친구, 물질, 명예…. 스스로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강제로 버리게 하실 것이다. 그나마 강제로 버리게 하는 사람은 무언가 하나라도 건질 것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을 향해 꺼진 불꽃을 다시 타오르게 하자.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걸어가고, 이방인조차도 신념 위해 걸어간 그 길을 우리는 마땅히 걸어야 할 것이다.

기영석 신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