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무릎 꿇을 수 없는 그 순간까지

활동보다는 존재가치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현존 속에 살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기도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기도할 때 예수님과 눈을 마주쳐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현존 속으로 쉽게 들어가게 됩니다.”

40년에 가까운 수도생활을 하신 레이몬드 신부님의 말씀이 귓가에 생생하다. 수도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성무일과에 따라 그 기나긴 시간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똑같은 기도를 반복해 오신 신실함과 끈기에 감동이 밀려왔다.

기도하는 자세에서부터 기도내용까지 일일이 자상하게 조용한 목소리로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는 직접 해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눈을 감으라고 하셨다. 십자가의 길을 그 자리에서 우리들은 레이몬드 신부님과 그리고 주님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1처 사형 선고 받으심, 사형 선고를 받으신 예수님의 눈과 마주치십시오.” “2처 예수님 십자가 지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눈과 마주치셨습니까?” 이어서 3번의 넘어지심과 3번의 만남이 지나가면서 어느새 눈가에 눈물방울이 가득 맺혔다.

여전히 풋내기로서 지루함을 느껴 몸부림을 치는 나의 삶. 다른 것에 너무 시선을 빼앗기다보니 주님의 일을 했노라고 하면서 하루에 서너 네 시간씩 기도를 드렸노라고 하지만 시간만 읊조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쩜 지금까지 많은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 대부분의 기도가 나에게 초점이 맞춰진 듯하다. 늘 내게 있는 현실의 문제에 급급해 이것저것 생떼도 쓰고, 울기도 하고, 부르짖기도 했다. 정작 기도를 받으셔야 할 주님은 너무 외롭지 않으셨을까.

과연 나는 얼마나 주님과 가까워졌을까. 얼마나 주님의 현존 속에서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기도는 주님과 함께 호흡하고 주님을 함께 느끼며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건만 무릎은 꿇었지만,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었음을 다시금 보게 된다.

보이는 세계에 치중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펼쳐지는 경이로움을 얼마나 많이 놓치며 살아가고 있는가. 기도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눈에 보이는 것에 늘 초점을 맞추니, 영으로 임하시는 우리 주님을 곧잘 외면하고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세계는 진실한 기도 속에서 이루어진다. 결코 기도의 시간이 아니다. 무엇을 기도했는지, 누구를 향한 기도인지 이제 다시 분명히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나를 향한 시선에서 주님께로 시선을 고정하고 허공을 치는 기도를 거두어야 한다. 활동에 마음이 빼앗겨 명예욕으로 도배된 욕망으로 드렸던 기도를 멈추고 내 안에 사랑하시는 주님이 머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내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지를 주님 안에 조용히 머물며 들여다보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한다.

레이몬드 신부님은 영성생활뿐만 아니라 김치를 담그는 데도 달인이셨다. 신부님만의 독특한 과학적이고 오랜 경험과 연구결과로 얻어낸 결과였다. 오백포기에 가까운 김치도 신부님의 손만 거치면 맛깔스러운 김치로 재탄생하였다. 오랫동안 발효된 물김치, 무김치, 된장 등도 소박한 웃음을 지으며 앞치마를 두르시고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조금씩 맛을 보라고 주신다. 왠지 마음이 포근해지고 따뜻해진다.

오랜 동안 숙성된 김치들을 보면서 또다시 온몸으로 느낀다. 무엇이든 숙성되기까지 반복된 연습이 필요하구나. 그분께는 정말 수도자라는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으시다. 하지만 난 수도복은 입고 있지만, 여전히 세속인이다. 기도를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에 묻혀 살고 있으니 말이다. 반복적인 기도, 계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존재가치가 느껴지는 그 비결은 주님 안에 끊임없이 머무는 연습이다. 무슨 일이든 단시일 내에 이루는 것은 없는 것 같다. 끊임없는 연습이 필요할 뿐이다.

어느 날 한 형제가 로렌스의 겸손함과 한결같음에 큰 감명을 받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형제님처럼 늘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을 수 있나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늘 대화를 나누는 연습이지요. 하나님께서 바로 옆에 계시다고 생각하는 연습이랍니다. 그러면 그분의 사랑의 눈길이 느껴집니다. 전에는 저도 하나님께서 바라보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면 두렵기만 했습니다. 제가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지요. 그런데 그 죄를 이미 다 용서해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니 하나님께서 옆에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답니다. 저는 40년이 넘도록 이 연습을 해왔지만 아직도 부족하답니다.”

하나님의 현존 속에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를 연습하라. “기도하라 그리고 노동하라는 베네딕토 성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현존을 이끌어 낸 가장 큰 경건의 통로는 기도다. 기도는 우리가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 강력한 프로펠러(propeller)이다. 기도할 때, 비로소 진정한 활동의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의 현존 속에 살아갈 때 진정한 존재가치 또한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눈과 마주치기 위해 기도하니 절로 얼굴에 웃음이 나온다는 어떤 분의 말씀처럼, 주님 안에 머물 때 참된 기쁨이 있다.

더 이상 무릎 꿇을 수 없는 그날까지, 쉼 없이 기도하며 나아가야 하리라. 나의 삶이 주님의 인격으로 변하는 그 순간까지 내 몸을 치고 또 쳐서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하리. 주님 한 분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오롯이 주님만 사랑하는 그 기도의 끝자락을 온전히 붙잡아야 하리. 쉼 없이 달려가야 하리.

주님 품에 안기는 그날을 바라보며. 또 다시 무릎으로 기도의 산에 오르는 행복한 순례를 멈추지 않으리. 영혼이 주님만으로 깊게 숙성될 그때까지. 사랑하는 주님, 오늘도 저랑 눈 마주쳐 주실 거죠.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