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융합         
   

근래 “컨버전스”(Convergence, 융합)란 말이 화두가 되고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여러 기술이나 성능이 하나로 융합되거나 합쳐지는 것’을 뜻한다. 1과 1이 합쳐져 2가 아닌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 창조되는 것이다.

요컨대 기계, 화학, 전자, 전기, IT기술 등 서로 다른 기술들이 만나 융합을 이루면 그 결과 전혀 다른 새로운 결정체인 자동차가 되는 것이 컨버전스다. 바야흐로 세상은 컨버전스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맥락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융합을 생각해보았다.

분열이 아닌 융합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인간이 타락하여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분열에 분열을 거듭해 왔지만, 그 결국에는 하나로 융합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엿볼 수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타락한 아담은 그 책임을 하와에게 하와는 뱀의 탓으로 돌리면서 분열되었고, 그 아들 가인은 아벨을 질투하여 죽여 분열되고 말았다. 그 후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은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고, 이후 노아의 후손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각기 다른 지역에서 다른 언어와 문화, 종교를 형성하면서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버려지고 흩어진 인류를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로 모으려 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독선과 배타적인 성향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가 되는 융합을 시도하셨다. 비록 나라와 민족이 다르고 종교와 언어와 문화가 다르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구원의 길을 여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조건 없는 사랑 즉 아가페이시기 때문에 그 어떤 나라와 민족이라 할지라도 융합이 가능한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스라엘밖에 없었지만, 신약시대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 어떤 민족도 죄인도 용서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만이 우리만이 선민이라는 교만과 독선에 빠졌던 이스라엘은 그 배타적 성향 때문에 이방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조차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나와 다른, 내가 생각한 메시아의 틀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결국 나와 우리만을 고집하는 교만과 독선과 아집은 나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분쟁과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 속에 내재된 이런 타락한 인간의 속성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뜻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님 안에서의 융합

인류의 메시아로 오셨던 예수님은 “나는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다”고 하셨다. 선민이라는 우월과 특권의식에 젖어있던 유대인들은 죄인들을 정죄하면서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배척하지 않으시고 그 이방인과 죄인들의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어 주셨다. 그러기에 그 어떤 죄인일지라도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기꺼이 주님 앞에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공동체를 생각해보자. 그 안에는 교회도 있고, 노회와 총회도 있고, 선교단체, 수도회, 신학교, 기독언론단체도 있다. 그런데 서로 나와 같지 않다고 하면서 제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며 서로를 배척하고 분쟁한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주변 사람들이 “저들은 같은 집안이면서도 자기들끼리 저렇게 못 잡아먹어 야단이라”며 등을 돌릴 것이다. 또한 안티세력들은 호기를 잡아 크고 작은 비리를 폭로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주님과 진리 안에서 컨버전스 즉 융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주님 말씀하셨다. 불의하게 보이는 상대방, 비록 나와 다를지라도 받아들여야 할 때 생기는 십자가를 지고, 전혀 다른 언어와 문화와 종교 인격을 가진 이방인들도 받아들였던 예수님의 뒤를 따라 하나가 되자는 것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생소하고 이질적인 너와 내가, 너희와 우리가 만나 새로운 형제와 자매 동역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융합의 신앙공동체를 이루자는 것이다.

거룩한 융합

우리가 믿고 따르는 것이 진정 진리라면, 하나님께서 이 공동체를 세우셨다면, 어찌하여 우리는 하나로 융합되지 못하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혹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나는 잘 하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 너희를 우리가 어떻게 믿어’ 하는 자아 때문이 아닌가? 마귀는 항상 우는 사자와 같이 갈등과 분쟁과 다툼이 있는 곳을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

나와 다르다고 하는 것이 진리적으로 잘 정돈이 되면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구별되게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을 오도하면 자칫 바리새적인 자기 의(義)가 되어 나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게 된다. 타락한 인간의 속성 중에 교만과 아집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게 되는가? 내가 그 사람보다 잘하는 것이, 잘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잘하는 부분을 거룩한 구별로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정죄가 나가게 된다. 정죄는 또 다른 정죄를 낳고 결국은 다툼과 분쟁이 되어 분열을 가속화시키는 것이다.

혹자는 기독교를 분열의 역사라고 말한다. 아니다. 이것은 속 깊이 성경을 보지 못한 탓이다. 이면에 가려진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깨닫지 못한 단편적인 시각일 뿐이다. 보라 그리스도께서 정죄와 분열로 점철된 죄인들을 진리와 주님 안에서 하나 되게 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거룩한 성혈을! 주님의 희생과 사랑으로 골고다 언덕은 거룩한 융합의 용광로가 되었던 것이다.

철은 매우 강인하지만 그 자신의 단단함으로 인해 겸손하게 구부릴 수 없다. 그런 철도 용광로의 이글거리는 불속에서 구부러지듯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불속에서 녹아지는 겸손과 기꺼이 희생을 치른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거룩한 용합을 이룰 것이다. 거룩한 융합은 먼저 진리를 바르게 깨닫는 데에서 비롯된다. 우리 모두가 진정 길이요 진리이신 주님께로 향할 때 가능할 것이다. 이제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빛을 따르는 진리를 좀더 순수하고 바르게 탐구하자. 모래알 같이 흩어지기 쉬운 속성을 가진 우리를 거룩한 융합으로 이끄시는 진리를 찾아 나서자. 이제는 우리의 가정, 교회, 공동체, 사회가 다양한 특성을 가진 개체들을 하나로 만드는 거룩한 융합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이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