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와 반목을 뛰어 넘는 사랑의 공동체

 

지난 8월 하순경,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의 일련의 행보가 언론의 눈길을 끌었다. 그를 통해 통합과 화목의 비결을 생각해보았다.

광폭과 파격

박 후보는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다음날인 21일 국립서울현충원의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과 봉하마을의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고 권양숙 여사를 만났고, 22일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방문했고, 이희호 여사를 찾아갔다. 대선 후보의 첫 외부 일정으로는 이례적으로 지지 세력보다 반대파인 진보 진영의 지도자를 먼저 찾은 셈이다.

이런 행보는 후보 수락 연설에서 “이념과 계층, 지역과 세대를 넘어 모두가 함께 가겠다” 고 밝혔던, 국민 대통합의 의지를 실천한 것이리라. 이념과 지역, 계층 간 대립이 심화되고 갈등 양상이 거칠어지고 있는 현 정치상황에 올바른 지향이자 적절한 처신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행보에 ‘광폭’이니‘파격’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정치 현실이 비뚤어져 있다는 증거다. 일개 대통령 후보가 한국 현대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전직 대통령들을 찾고 참배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일이 이례적이거나 파격적으로 비춰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경쟁 상대에게 너무 네거티브 전략만 구사하는 우를 범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선거철만 되면 상대의 약점이나 비리를 캐내어 확대 선전하여 자신의 유익을 얻고자 했던 사례가 너무 많았다.

반면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성숙한 인격의 표임에도 불구하고, 모르쇠나 오리발을 내밀며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았던 모습이 얼마나 많았나. 이런 사람들이 어떤 단체나 사회의 리더가 된다면 그의 교만과 독선, 그리고 그 무책임함에 국민들은 적잖은 피해를 입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민주통합당이 박 후보의 행보를 ‘정치 쇼’라며 깎아내리려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화해와 통합의 리더십에 공감한다면 무조건 비판할 게 아니라 더 넓은 화해, 더 깊은 통합의 방향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비록 박 후보의 행보가 대선 표를 의식한 이벤트라고 하더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낫다. 무작정 꼬투리를 잡는 식의 비판은 자신의 편협한 마음을 드러낼 뿐이다.

대화와 협상으로

여야 모두가 이제 대통합 행보가 일회성, 과시성에 그치지 않도록 진정성이 담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울러 대통합의 이념을 구현할 구체적인 후속조치, 경제적 약자에 대한 지원과 사회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한 정책들을 지속적으로 내놓아야 한다.

무엇보다 경쟁자를 타도의 대상이 아닌 대화와 협상의 대상으로 보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태도가 바탕이 돼야 선거전에서 지더라도 자신의 패배를 수월하게 받아들이고 상대에게 박수를 보낼 수 있는 성숙된 문화가 가능해진다.

이런 성숙함이 필요한 것은 교회나 선교회 등 신앙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교회가 어둔 세상의 빛이요 썩어가는 세상의 소금이라 해도 사랑을 잃어버리고 비판만 한다면 누가 교회를 신뢰하고 따르겠는가. 사랑이 부족한 비판과 입바른 소리는 잔소리가 되기 쉽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너무도 부당하고 억울하게 십자가형을 당하셨지만, 자신을 향해 욕하고 저주하는 이들에게 긍휼의 마음으로 중보하시는 그 사랑에 마음이 녹아내리기 때문이다. 그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세상이 알리라.” 긍휼과 사랑 없이 함부로 빛과 어둠을 분별한다는 명분하에 비판, 정죄하지 말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더 많다.

일찍이 필자의 영적인 멘토였던 분이 계셨다. 그분은 영적인 지도자로서 마땅히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바로잡아야 할 때에도 성급하게 지적하지 않으셨다. 처음에는 알고도 모른척 하시다가 몇 번 잘못이 반복되면, 그제야 솜방망이처럼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조심스럽게 권면하시고, 그래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믿음으로 사셨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조급하게 내가 해결하려고 한다. 성급한 마음으로 하다 보니 덕과 지혜가 부족하여 오히려 일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편을 갈라서 내편이 아니면 확실히 죽이고 확인 사살까지 하려는 게 타락한 인간의 속성이다. 이 때문에 서로 다투고 갈라지는 것이 교계의 이면에 드리워진 아픈 역사가 아닌가.


돌아오는 공동체

예수님처럼, 멘토였던 그분처럼, 우리도 좀 넉넉한 마음으로 살자. 상대방이 좀 부족해도 문제를 일으켜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도 전혀 까막눈이 아닌 이상 좀 기다려주자. 그러다가 아니다 싶으면, 그래서 꼭 문제를 바로잡고자 한다면 먼저 내 속에 그에 대한 긍휼과 사랑이 있는지 확인해보자. 그리고 조심스럽게 겸손과 온유함으로 권면해도 늦지 않다.

이런 노력이 대통합과 화목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사랑이 부족한 비판은 상대방이 즉각 알아차린다. 겸손과 온유와 사랑이 없는 비판을 마귀가 얼마나 좋아하겠나. 수군수군 하는 배후에는 더러운 개구리 영들이 역사하고 있음을 명심하자. 세상 정치인들에게 이런 수준 높은 덕목까지 요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예수님의 빛을 따르고 하나님의 선을 추구하는 신앙 공동체라면, 마땅히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 한 말이 기억난다.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지 맙시다. 우리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다 사소한 일입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따로 있다. 그때를 성경은 ‘대환난’이라고 한다. 깨어 있는 종들이 주의 재림이 심히 임박하다고 증거하고 있다. 적그리스도의 때가 되면 우리는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당연히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남들이 어떻게 사느냐에 신경을 곤두세우기보다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께 원수까지 사랑하는 내 중심을 드리자. 화목한 공동체하면 누가 좀 잘못되고 삐뚤어져도 다시 회복되거나 돌아오기가 그만큼 쉬울 것이다. 그러나 불화와 반목과 정죄가 난무한 그곳에 누가 다시 돌아가고 싶을까.

“주여, 불화와 반목을 뛰어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이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