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안에 있는 휴식

두 나무꾼 친구가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 두 사람은 경쟁적으로 나무를 해나갔다. 한 나무꾼은 유달리 승부욕이 강해 친구에게 지지 않으려고 이른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도끼질을 했다. 그러나 다른 한 친구는 옹달샘에서 물을 마시며, 50분 일하고 10분씩 쉬면서 숨을 돌려가며 일했다. 산에서 내려갈 때가 되어서 두 나무꾼은 각자 수고한 결과를 비교해 보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쉬면서 일한 나무꾼이 더 많은 나무를 장만했다. 승부욕이 강한 나무꾼은 투덜거리며 친구에게 이유를 물었다.

“내가 더 열심히 쉬지 않고 일을 했는데 왜 자네 것이 더 많은가?”

그러자 다른 나무꾼 친구가 점잖게 대답했다.

“나는 10분간 쉴 때마다 도끼날을 갈았다네!”

열심만 낸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라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다. 사실 열심히 일만 한다고 능률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적당한 쉼을 통해, 충전하는 시간이 있을 때 더 능률이 오르는 것이다. 마가복음 6장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 가서 쉬라고 하시는 말씀을 볼 수가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제자들과 식사할 겨를도 없게 되었을 때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6일간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던 것처럼, 우리는 누구에게나 적당한 쉼이 필요한 것이다.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연습하려면, 풀어 놓았던 줄을 팽팽히 당겨서 음을 맞추어야 한다. 바이올린을 연주하지 않을 때 줄을 팽팽하게 당겨 놓으면 바이올린은 휘어져 망가지고 만다.

단 20분을 연주하려고 해도, 10분 이상은 줄을 팽팽히 하여 음을 맞추어야만 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팽팽하게 당겨 놓은 바이올린처럼 언제나 팽팽한 긴장상태가 계속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건강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연주하지 않을 때 줄을 풀어 놓는 것처럼, 적당한 쉼이 필요한 것이다.

금년 여름에는 모처럼 전교인이 바닷가에서 휴양회를 가졌다. 작년부터 계속되어온 여러 번의 은사집회, 영성집회, 계시록집회, 40일 릴레이 금식기도회 등으로 긴장된 신앙생활이 계속되었기에 모처럼 긴장을 풀고 바닷가로 휴양회를 가게 된 것이다. 마침 남전도회에서 이 행사를 주관한다기에 큰 부담 없이 동참하게 되었다. 쉬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이름도 수련회대신 휴양회라고 고쳤다.

그러나 막상 한여름 휴가철에 바닷가를 가보니, 거기는 쉴만한 곳도 한적한 곳도 아니었다. 육신은 쉼이 될지 몰라도 영적으로 재충전하는 쉼은 그곳에 없었다. 휴가철의 여름바다는 온갖 정욕이 날뛰는 곳이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 사방에서 음식냄새, 술 냄새, 수영복차림의 사람들, 텐트 자리 값, 주차비, 평상 빌리는 값, 전기세, 온갖 음식, 과자, 음료는 모두 바가지 상술이고 부르는 게 값이었다. 온갖 소리들이 사방에서 들려 무슨 소리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한쪽에서는 동창회 노래자랑, 다른 쪽에서는 각설이 타령, 장사꾼들의 떠드는 소리, 아이들 우는 소리, 그중 어느 교회의 예배 중 설교도 들려왔다….

쉼은 좋은 것이지만, 단순히 육신의 쉼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쉼에는 반드시 영적인 재충전이 있어야만 한다. 도끼질의 목적은 나무를 쓰러뜨리는 것이다. 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해 도끼질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도끼질을 제대로 하려면 우선 날부터 날카롭게 다듬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도끼질에 급급해서 날이 무딘 것을 애써 무시한다. 나무를 쓰러뜨리는 게 목적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도끼질에 얽매여 있는 셈이다. 영적인 도끼날을 부지런히 갈자. 주님이 운영하시는 안식의 숲에, 말씀과 기도의 그늘에 앉아서. 풍성한 내일을 위해 기꺼이 10분간 도끼날을 가는 지혜로운 나무꾼이 되어야 하겠다.

여름 휴양회는 영적 유익이 없었지만, 그래도 바다를 보면서 나름 교훈을 얻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는데, 소금이 바다에서 나온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새삼 깨달아졌다. 우리가 소금이 되려면 바다를 닮아야 한다. 온갖 오물을 다 버려도 묵묵히 받아내는 바다의 마음, 누가 무어라 해도 묵묵히 파도를 치며 소금을 만드는 바다의 모습. “부셔져야 하리”로 알려진 복음성가이지만, 원제목은 “바다에 뜨는 별”인 시가 생각이 난다.

“부서져야 하리 더 많이 부서져야 하리 / 이생의 욕심이 하얗게 소금이 될 때까지 / 무너져야 하리 더 많이 무너져야 하리 / 억 만 번 부딪쳐 푸른 상처로 질펀히 드러눕기까지 / 깨져야 하리 더 많이 깨지고 또 깨어져 / 자아와 교만과 아집이 하얀 물보라가 될 때까지 / 씻겨야 하리 더 많이 씻기고 또 씻겨 / 제 몸 속살까지 하늘에 비춰야 하리 / 그래서 비로소 조용해지리 / 슬픔도 괴롬도 씻기고 부서져 맑고 깊은 바다 되리 / 그 영혼의 바다에 맑고 고운 사랑의 별 하나 뜨게 하리.”

이 복음성가를 작시한 분의 남편이, 40대 후반 과로로 병원에 갔다가 급성간암이란 진단을 받고 불과 몇 주 만에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다. 모태신앙이었지만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실망과 불신으로, 세상과도 단절하고 한 줄 시도 쓰지 못한 채 몇 년 동안 극심한 고통 속에서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삶을 살았다. 급기야 삶을 포기하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며, 바닷가를 거닐다가 이 시를 쓰게 된 것이다. 바다의 교훈인 셈이다.

휴양회는 다행히 한 가지 교훈이라도 얻어서 잘 끝났지만, 다시 바다를 간다면 아무도 없고 한적한 겨울바다를 택할 것이다. 그리고 바다가 아니어도 거기가 어디든 주님이 계신 곳이라면 가서 드넓은 주님의 쉼터에서 맘껏 충전하고 올 것이다.

이안드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