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과거 아날로그 방식의 시계를 보면 크고 작은 톱니바퀴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갑니다. 서로가 어긋남이 없이 서로를 돌려주기 때문에 그 힘으로 시간을 맞춰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를 가만히 둘러봐도 성격도 취미도 습관도 다른 분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교회나 교단 공동체가 움직이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성격, 다양한 생각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더 나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갑니다.

누가복음에서 보면 베다니 잔치에서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서 말씀을 듣고 언니 마르다는 식사 준비를 합니다. 여기서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역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의 장면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집에 초청했는데, 마르다는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했고,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서 가르침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다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자기는 힘들게 음식을 만들고 있는데 어떻게 마리아는 저렇게 모른 체하고 앉아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참다못해 마르다는 예수님께 얼굴을 붉히며 말합니다.

“주님, 마리아에게 나를 도우라고 명하세요.” 마르다가 적극적이고 일 중심의 인물이라면, 마리아는 수동적이고 내면 중심의 인물입니다. 완전히 다른 성격과 가치관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서로를 이해한다면 둘은 실과 바늘 사이가 될 것이지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면 둘은 원수처럼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도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르다는 음식을 만드느라 수고가 많고, 마리아는 값비싼 고급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어드립니다. 그런데 옛날의 마르다가 아닙니다. 마리아를 전혀 원망하지 않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깊이 만났고, 그 결과 감사와 기쁨의 땀을 기꺼이 흘린 것입니다.

우리 교단 공동체에서는 여름과 겨울, 일 년에 두 차례씩 말씀 잔치인 심령부흥대사경회가 열립니다. 사경회 행사가 있으면 몸이 아프고 시간이 없어도 수고를 아끼지 않는 마르다와 같은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한 분이라도 진리의 말씀을 듣고 은혜 받기를 소원하여 더위와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도하는 마르다, 맛난 음식을 대접하고자 정성껏 준비하는 마르다, 안내를 위해 내내 서 있는 마르다, 어린아이들을 돌보아주는 마르다, 화장실의 휴지통을 비우고 청소하는 마르다, 교통정리를 위해 밖에서 뛰고 있는 마르다와 같은 분들이 계십니다.

또한 마리아 같은 분들도 필요합니다. 집회를 통해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마리아, 은혜로운 집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마리아,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들의 성령 충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마리아, 봉사자들의 안전을 위해서 기도하는 마리아가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사모하는 분들, 기도로 동역하시는 분들, 기쁨의 땀을 흘리시는 분들 모두를 사랑이 담긴 시선으로 보고 계실 겁니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며, 동시에 마르다처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시간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르다의 일도 마리아의 일도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맡긴 그 일을 사랑하고 감사함으로 행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어떤 일에서도 주님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 안에서 맡겨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서로를 걱정하고 아껴주는 분들은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한 곳을 바라보며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들이지만 임마누엘의 주님이 계시기에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갈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시133:1-3).

박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