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눈물

 

입에서 김이 나올 정도로 추운 날씨다. 성경을 왼쪽 팔에 끼고 종을 치면서 새벽을 깨우며 다녔다. 잠시 후 몸을 움츠리며 종종걸음으로 한 분, 두 분 지하 성전으로 나오셨다. 예배를 드린 후 개인기도 시간에 무릎과 어깨가 차갑고 시려 무릎덮개를 덮고 기도를 해도 온 몸이 시려왔다. 콧물이 자꾸 흘러내려 무릎덮개로 코를 막고 엎드려 기도하는데 이현필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보라 속에서 밤새 기도하시다가 새벽에 내려오셨다. 수염에 고드름이 얼어붙은 채로. 허름한 옷차림과 꽁꽁 언 맨발에 발가락이 얼어 터져 피멍이 든 초췌한 모습.

조금 춥다고 이 새벽부터 또 엄살을 부렸나. 종지기로 20년 넘게 살아오면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하셨는데, 어느덧 늙은 아담이 되어 요령만 피우고 있다. 이 능구렁이를 어떡하면 좋을는지. 울자고 하면 울지도 않고, 웃자고 하면 웃지도 않고, 알도 못 낳는 늙은 암탉처럼 볼썽사나운 종지기다. 노트르담의 꼽추, 카지 모드는 자신의 몸집만한 종을 울릴 때마다 미친 듯이 크게 웃으며 힘껏 뛰어다녔는데, 나는 밥값도 못하고 있다.

권정생 선생님(1937-2007)은 16년간 안동 일직교회에서 한겨울에 장갑도 없이 새벽마다 맨 손으로 종을 치셨다. 폐결핵과 늑막염으로 키가 170cm인데도 몸무게가 37kg을 넘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여기에 신장을 드러내는 수술 등으로 소변 주머니를 차고 살아야 했지만, 자연과 기도를 벗 삼으며 ‘빌뱅이 언덕’ 작은 흙집에서 혼자 청빈하게 살다 하나님 품으로 가셨다. 10억여 원을 어린이들에게 써달라는 유언만을 남기고 간 그를 사람들은 “성자가 된 종지기”라고 하였다. 그분이 남기고 간 『하나님의 눈물』이란 책이 있다.

『눈이 노랗고 털빛도 노란 돌이 토끼는 칡넝쿨이랑 과담풀이랑 뜯어먹으면 맛있지만 마음이 아프다. 뜯어 먹히는 건 모두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배가 고픈 돌이 토끼는 조심조심 풀무꽃풀에게 다가가 널 먹어도 되느냐고 물어 본다. 그 말을 들은 풀무꽃풀은 바들바들 떨면서 먹으려면 차라리 묻지 말고 그냥 먹으라고 한다. 먹힌다는 것, 죽는다는 것은 모두 운명이고 마땅한 일이지만 돌이 토끼는 차마 먹지 못하고 돌아서고 만다. 그렇게 댕댕이덩굴, 갈매덩굴도 못 먹고 바다취, 고수피나물, 수리치나물도 먹지 못하고 그만 저녁때가 된다. 해님이 서산 너머로 넘어가고 있다. 너무 배가 고픈 돌이 토끼는 해님에게 하루 동안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누군가를 먹고 살고 살아야 하는 것이 이렇게 괴로우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하며 울어버린다. 덩달아 울고 싶어진 해님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서산 너머로 넘어간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홀로 밤을 맞은 돌이 토끼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나님께 여쭈어 본다. “하나님, 하나님은 무얼 드시고 사셔요?” 어두운 하늘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보리수나무 이슬하고 바람 한 줌, 그리고 아침 햇빛 조금 마시고 살지.” “어머나! 그럼 하나님, 저도 하나님처럼 보리수나무 이슬이랑 바람 한 줌 그리고 아침 햇빛을 먹고 살아가게 해주셔요.” “그래, 그렇게 해주지. 하지만 아직은 안 된단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남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세상이 오면 금방 그렇게 될 수 있단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요?” “그래, 이 세상사람 모두가. 하지만 내가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는데도 사람들은 기를 써가면서 남을 해치고 있구나.” 돌이 토끼 얼굴에 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하나님이 흘린 눈물이다.』

나의 욕심어린 눈과 사람들의 욕심에 가득 찬 눈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눈물짓게 한다는 사실. 노아의 때 홍수로 심판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그 누가 알랴. 흥청망청 쾌락을 즐기며 날마다 먹고 마시고, 서로 물고 뜯으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썩을 때로 썩어버려 부패한 인간들. 악이 관영한 인간 세상을 보시고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저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 나라가 아니건만 땅의 사람은 온통 먹고 마시는 것에 관심이 쏠려 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간을 지으신 것을 탄식하시며 홍수로 싹 쓸어버리려고 작정하셨을까(창6:7). 어쩜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눈물이 대홍수가 아니었을까.

경건하게 살아가며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던 노아만은 달랐다(창6:8). 공동번역에는 “그러나 노아만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라고 되어 있다. 노아는 하나님의 눈물을 보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 언제나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었다(창6:9).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닫고 살아가는 그때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방주를 예비하였다(창6:13).

노아처럼, 순수한 어린아이 때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 어찌할꼬. 걷잡을 수 없이 죄악으로 치닫는 이 세상. 악이 무르익을 대로 익은 이 세상을 보시고,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시고 울고 계실건가.

무너져가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던 예수님, 죄악으로 무너져가는 인간 세상을 보시고 또다시 울지 않으실까? 예수님은 지금도, 오늘 이 시간도 피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인류 마지막 한 사람의 비극이 계속되는 그 시각까지 예수님은 울고 계신다. 십자가 위에서 피눈물을 흘리시던 예수님의 마음을 그 누가 알꼬. 한 영혼이라도 구원코자 하시는 영혼에 대한 애끓는 그 마음을 누가 알꼬.

20여 년 전 1989년 12월 19일 새벽, 밤새 고민하며 기도하던 중 눈가에 눈물이 고이신 예수님을 보았다. “주님, 왜 우세요?”라면서, 주님 발 앞에 몇 시간을 뒹굴며 온 몸이 땀이 다 젖도록 울었다. 눈물 고인 눈으로 측은히 이 죄인을 보시는 그 모습 속에서 주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주님의 그 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주님의 그 눈물이 지금까지 나를 이곳까지 인도해 오셨다.

주님이 아파하는 그곳에, 주님의 눈물이 있는 그 땅에 나도 서리라.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십자가의 길. 그 슬픔의 길을 묵묵히 따라가리라. 오로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만 따라가리라. 이 길이 아무리 험난하더라도, 고독하고 눈물겨워도 우리 주님 걸어가신 길이오니 천 리고 만 리고 비바람 눈보라 쳐도 이 길을 가리라. 부모도 형제도 일가친척도 다 버리고 주님의 핏자국 따라, 주님의 숨결 따라 가리라. 주님이 쓰러지신 곳 나도 쓰러지고, 주님 죽으신 그곳에 나도 죽으리라. 주님을 부르다 목에서 피를 토해 바닥을 붉게 물들이며 멎을 줄 모르는 애끓는 넋이 되어, 울고 또 울어 주님과 함께 타다 죽는 제물이고 싶다.

한 해가 또 저물어 간다. 앞뜰에 꽃도 지고 서리도 내리고 뒷산엔 단풍도 다 떨어지고 천년의 변함없는 세월 속에 가고 있다. 그러나 내 맘속에 멎을 줄 모르는 주님 향한 애끓는 마음과 영적 스승님이 남겨주신 귀한 말씀들이 뼈에 사무쳐 온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흘리며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하는 이내 마음.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우리 예수님. 오, 주님!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동이 트는 새벽하늘을 바라보며 주님을 기다리는 늙은 종지기가 방황하는 영혼들을 깨우는 밝은 종소리이길 소망해 본다.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