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또 다른 이름

하나님의 길은 사람의 길과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그것이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새롭게 체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사순절을 보내며 제 자신은 부끄러운 모습밖에는 드릴 것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희귀병으로 몸이 많이 힘들어진 남편은 혼자서 식사를 할 수 없기에 음식을 먹이고 약까지 챙겨 먹여야 합니다. 식사를 마치면 용변을 도와주고 세안을 시켜줍니다. 걷는 것이 불편한 남편은 언제 다쳤는지도 모르게 여기저기 상처가 있습니다. 상처 난 곳을 소독해주고 연고를 바른 후 잠자리를 도와주면 그제야 한숨 돌릴 여유가 생깁니다. 그날도 남편의 잠자리를 도와준 후 유전병으로 아빠처럼 몸이 불편한 윤중이를 보살피는데 평상시와 달리 우는 소리를 냅니다. 말을 할 수 없기에 아파할 때면 속이 탑니다. 대변을 보려고 하는가 싶어 살펴보았지만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여기저기 살피는 데 입 속을 보니 아기 손톱만한 송곳니가 잇몸을 뚫고 쏙 나와 있었습니다. 새로 나온 송곳니가 흔들리는 기존 치아를 건드려서 아파 우는 것이라 생각 되었습니다.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이라 문을 연 치과병원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까지 기다리기엔 말도 못하는 아이가 밤새 아픔으로 고통할 것을 생각하니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114를 통해 먼저 가까운 동네치과병원에 전화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감사하게도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치과병원에서 오늘 야간진료를 보니 빨리 데려 오라고 했습니다. 허겁지겁 아이에게 옷을 입혀 나가려는데 남편이 가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남편의 저녁 일과를 도와주느라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하고 몸은 탈진 상태에다가 아파 우는 아이로 인해 놀라 있는데 그런 소리를 듣자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도대체 아이가 아파서 병원 간다는데, 아빠로서 가지 말라니 그게 말이 돼요? 정말 자기밖에는 몰라.”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는 나왔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남편에 대한 분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아니 무슨 마음으로 가지 말라고 한 거예요?” 남편은 어눌한 발음으로 말합니다. “혼자 있기 싫어.” “애기예요? 혼자 있기 싫게. 금방 다녀올 텐데.” “멀리 가는 줄 알고, 오래 걸릴까봐.” 마음이 찡했습니다. 잠자리에 누워 어린아이처럼 제가 오기만 기다렸을 남편의 손을 꼭 잡아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안심이 된 듯 잠이 들었습니다.

병이 진행되면서 점점 아이처럼 변해가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사랑과 배려하는 마음을 갖지 못했던 제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해 드리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셔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수난과 고통과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비움과 자기 낮춤의 모범이었습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죽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의 양으로 판단받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쏟았던 사랑의 무게로 판단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자기희생으로부터, 곧 아픔을 느낄 정도의 큰 희생에서 흘러나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순절을 지내며 한없이 부끄러웠던 제 모습을 예수님이 누우셨던 무덤에 묻고, 예수님을 따라 희생해야만 체험할 수 있는 부활의 아침을 소망해봅니다.

박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