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때를 알리는 핵전쟁

 

성경에 예언된 대로 마지막 때의 신호탄이 울려 퍼지고 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24:7-8). 높아질 대로 높아진 바벨론 성과 같은 이 세상이 점점 악으로 들끓고 있다. 노아의 시대보다도, 소돔과 고모라 시대보다도 더 악해져가고 있다. 이 세상에 곧 재앙이 임할는지 알지 못한 채 마치 온 세계가 거대한 악의 물결에 표류하는 배와 같다. 온 세상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밤낮으로 울부짖고 있다.

교회들마저도 힘을 잃고 죄악세상을 망연자실 보고만 있다. 이러한 죄악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한 핵폭탄보다 더 무서운 대환난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데, 이를 대비할 대안은 무엇일지 안타깝기만 하다.

북한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핵무기를 이미 보유하고 있고, 여차하면 남한뿐만 아니라 일본까지 초토화시킬 수 있는 핵을 보유하고 있다. 나아가 미국 본토까지 핵폭탄을 투하할 수 있는 핵보유국이라고 전해진다.

핵무기 비축실태에 관한 UN보고서에 의하면 현재 세계를 여러 번 완전히 파괴시키고도 남을 핵무기가 지구 곳곳에 비축되어 있다고 한다. 미국과 러시아, 양국의 핵력을 합친 폭발력은 2차 대전 때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폭탄의 1백 30만 배에 달한다고 한다.

더욱 위험한 것은 핵무기 경쟁이라는 광기 속에서 재래식 무기 개량은 물론, 더 새롭고 가공할 핵무기를 만들어내려는 강대국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각국이 국방비 증액에 광분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사회, 경제, 정치적 타격문제, 부도덕, 빈곤이 극심하다. 특히 북한은 수십만의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핵실험과 화학무기 개발에 혈안이 되어 있다.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대로 지금 전 세계는 핵실험과 핵전쟁을 위해 미쳐 날뛰고 있다. 우리는 지금 언제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질지 모를 핵폭탄의 위험 속에서 살고 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요, 운명이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영성의 회복이 절실하다. 영적인 핵폭탄으로 무장할 때다. 철저히 무장해야 한다. 핵폭탄 한 방이면 군인 100만 명을 한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는 것처럼, 지금은 마귀도 고도의 전략과 무기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더 이상 고물상의 고철과 같은 무기 즉 교회에 팽배해 있는 기복주의 사상으로는 마귀에 대항할 수 없다. 교회와 목회자, 선교사, 신학생, 평신도 누구나 할 것 없이 속히 하나님의 밝은 빛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성경의 진리’로 철저히 무장해야 한다. 예수님의 영성, 즉 예수님의 말씀과 빛된 인격으로 철저히 무장해야 한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밝은 빛의 핵을 폭발시켜야 핵융합작용이 일어나서 놀라운 영적에너지를 발산시킬 수 있다. 세속화된 기복신앙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열두 제자들처럼, 사도 바울처럼 수도자적 선교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분명한 영적인 가치관과 목표가 있어야 한다.

익은 열매에 대한 신앙의 목표를 분명히 가져야 한다. 믿음으로만 구원이 다 된 줄로 착각하지 말고, 완전구원 즉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 대부분의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의 완성을 이룬 듯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믿음의 첫 출발점인 출애굽은 되었을지라도 믿음을 의롭게 여기는 “칭의”의 단계는 아직 미완성이다. 육과 영 안에는 여전히 타락하고 부패한 애정과 욕망과 죄성과 결점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부터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 성을 완성할 때까지의 500년 역사를 통해서 성도들이 구원받는 순간부터 완덕(完德)에 도달하기까지의 영적 성장과정에 대한 모형을 보여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탄압을 받다가 출애굽하여 40년 광야의 길을 통과한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있었던 모든 사건들은 성도들을 정결케 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의 핵심진리 중의 핵심이 바로 이 ‘모형적 진리’다. 이는 모든 성도들이 광야 40년 연단과정을 통하여 익은 열매가 될 수 있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결코 구원의 완성은 단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철저한 회개생활로 티끌만한 죄라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철저히 회개하는 삶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신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나 의지나 생각이나 모든 행실들과 마음을 철저히 성찰하며, 늘 애태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범죄할 때마다 아파하며 자꾸 회개하면서 성령의 맑은 물로 씻어야 한다. 먼지가 묻게 되면 자꾸 닦고, 닦고 또 닦으면서 한평생 그 일 하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야 한다. 회개가 시원하게 안 되었다고 생각이 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시원한 회개를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일하면서라도, 어디를 가면서도 하나님 앞에 좀 더 시원하게 회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분초마다 순간순간마다 회개생활을 거듭하는 성도가 가장 훌륭한 성도다. 철저히 참회하면 할수록 빛과 어둠을 분별할 수 있는 양심의 눈도 더 밝아지고, 빛의 열매도 더 풍성히 맺을 수 있다.

또한 수도적인 영성생활 없이 영성생활의 회복은 불가능하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은 철저히 수도적인 삶이었다. 오랜 교회 역사 속에서 알 수 있듯이, 수도원은 교회의 세속화를 막아주고 맑은 물을 공급해주는 영적 수원지였다. 개신교는 수도적 삶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수도원 운동은 종교개혁보다 더 큰 운동이다. 영성이 회복되려면 신학교, 교회, 가정에 이르기까지 수도적인 영성생활을 추구해야 한다. 영성생활과 수도생활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방 땅에서도 하루에 세 차례 기도한 다니엘처럼, 세상 속에 살아도 규칙적으로 성무일과를 지키며 살아가는 재속수도사가 되어야 한다. 왜 사는가? 예수님의 영성을 닮아가는 것, 성화되기 위해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삶이다.

세계 각지에 400명 가까운 선교사를 파송한 바울선교회의 대표이신 이동휘 목사님과 자주 만나 대화도 하고 사역도 함께하는데, 선교도 수도선교를 해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신다. 그분을 뵐 때마다 겸손의 향기가 묻어나와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데, 수도적인 삶을 추구하시는 참 훌륭한 목사님이시다. 에스더 기도운동본부의 L교수님도 북한선교를 위해 결혼도 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위해 수도적인 삶을 살고 계신다.

적당한 예배교인으로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될 수 없다. 남들이 잠자는 시간에 깨어 기도하고, 남들이 즐겨 먹는 것을 철저히 절제하고, 남들이 누리는 것을 버리고 포기하는 삶이 수도생활이다. 복음삼덕 즉 청빈, 순결,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이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철저히 못 박으며 자기부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저 사막의 교부들처럼 도심 속에 있을지라도, 어느 곳에 있든지 철저한 회개생활과 엄격한 극기생활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속에서 무한한 영적폭발력을 가진 영성의 핵을 보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종교적 타락, 종교지도자들의 부패에 아파하던 예레미야의 눈물이 보이는가. 듣든지 아니 듣든지 마지막 때 주님의 명령 따라 담대히 외치리라. 저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돌에 맞아 죽더라도, 저 에스겔 선지자처럼 가시와 찔레와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성경의 진리를 더 높이 들리라.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일어나고 있다. 주님이 곧 임할 것이다. 지금은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 한국 교회를 위해 금식하며 울 때다. 성경의 진리로 철저히 무장하여 이 한국교회를 살릴 때다. 다시 한 번 철저한 수도적인 영성생활로 이 땅 위에 영성의 핵을 폭발하여, 영적 전쟁터에 승리의 깃발을 꼽을 때다.

박희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