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손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아파트라 화단이 없습니다. 훗날 마당이 있는 집을 갖게 되면 어릴 적에 정들었던 나팔꽃, 분꽃, 채송화, 사루비아 등 일년초를 가꾸고 싶습니다. 손이 덜 가는 꽃들도 있지만, 세심한 손길로 돌보아 줄때에 비로소 만날 수 있는 꽃들도 있습니다. 작은 국화꽃을 닮은 마가렛 꽃은 해가 부족하게 되면 작아지고 빨리 져버리기 때문에 손이 많이 갑니다. 식물인 꽃들도 세심한 손길로 정성껏 돌봐줄 때 여러 빛깔의 꽃잎을 피워내며 아름다움을 표하는데 하물며 사람은 얼마나 더 세심한 손길을 필요로 할까요?

미켈란젤로는 “창조주여 오소서”라는 기도문에서 영감을 받아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의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를 그렸다고 합니다. 창조의 숨결을 하나님의 오른손가락으로 표현한데서 착안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손가락과 아담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그려진 장면은 아담이 하나님에게 숨결을 받는 순간을 두 손가락의 만남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그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생명의 시작은 반드시 하나님의 어루만짐이 있어야 합니다.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어루만져 주신다는 생각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평안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상처로 어두워진 자들, 분노와 미움으로 갈기갈기 찢겨진 자들, 온갖 각색 질병으로 신음하는 자들을 따뜻한 손길로 보듬어 주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손은 무한한 긍휼의 발로입니다.

긍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인 ‘라카밈’은 야훼의 자궁을 일컫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이 어찌나 깊고 중심적이며 강력한 감정인지 하나님의 자궁이 움직인다는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긍휼로 인해 우리들의 모든 삶의 근원과 모든 사랑의 근거가 열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과부와 고아는 언제나 긍휼의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가난이나 아픈 설움이 어떤 것인지를 아시는 분이기에 자식을 품안에 품듯 그들을 남달리 챙기십니다. 누가복음에만 수록되어있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야기는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주님의 긍휼의 손이 역동성 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인성의 뜻은 ‘아름답다, 기쁘다, 즐겁다’라는 뜻을 가진 성입니다. 그러나 이름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성문 가까이에 이르셨을 때 한 장례행렬과 만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대로 지나치지를 못하십니다. 남편이 죽은 이 과부에게 외아들은 기쁨이요, 희망이요, 자신의 존재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내면의 빛이 꺼져버린 죽은 자와 같은 가련한 어머니에게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십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눅7:13-15).

예수님은 어머니의 모든 고통을 감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의 손은 죽은 청년을 다시 살려주신 것뿐만 아니라 그 어머니에게도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어떠한 상황도 얼마든지 뒤집어 놓으실 수 있습니다. 도무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상황도 예수님의 긍휼의 손이 개입하면 죽은 청년이 살아난 것처럼 바로 우리도 살아납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온전히 대신 겪으시며 십자가에 손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상함을 경험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멍에를 짊어지셨습니다. 그 긍휼의 손으로 인하여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손도 예수님을 닮아 사랑의 손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손을 내밀어 다른 사람을 보듬어 주어야겠습니다. 실의에 빠진 친구의 등을 쓰다듬어주고, 아픔으로 지친 환자의 손을 지그시 잡아주며,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픔에 잠긴 이웃을 따뜻하게 안아줄 때, 예수님의 손이 그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되돌려주실 것입니다.

박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