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아!

죽을 권리를 만드는 사람들
불치의 중병에 걸린 등의 이유로 치료 및 생명 유지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생물에 대하여 직·간접적 방법으로 생물을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행위를 안락사(安樂死, euthanasia), 혹은 존엄사라고 말한다.

최근 존엄사 논란의 중심에 선 사건이 있다.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어머니로부터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달라며 자녀들이 낸 소송에서 법원은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회복가능성이 없는 데도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환자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훼손할 수 있다며 김모씨에게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할 권리를 준다는 명목으로 첫 존엄사 판결을 내렸다. 이는, 김모씨의 평소 의사 표현과 생활태도에 대한 가족들의 증언만으로 김모씨가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고 자연스런 죽음을 맞이하고자 하는 의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표시했을 것이라고 추정하여 가장 중요한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안락사는 살인죄에 해당된다하여 아직까지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률은 없지만 상황에 따라 판결된 존엄사 인정에 대해, 존재하는 자에 대한 모욕이라며 비판과 함께 많은 의견들이 분분한 상황이다.
이러한 존엄사에 대한 법이 존재하는 외국의 경우에도 환자의 참기 힘든 고통과 죽음의 임박성, 환자의 자발적이고 진지한 요청이 있거나, 더 이상의 치료방법이 없거나 회생가능성을 고려하는 등 엄격한 요건 아래에서의 존엄사를 극히 제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1996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안락사를 허용하는 ‘말기환자법’을 통과시켰지만 6개월 만에 폐지된 사례와 같이, 존엄사란 ‘품위 있게 죽을 권리’란 무엇이며, 가치 있는 삶에 대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누가 결정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생명경시풍조와 장기매매성행 등의 부작용은 어떻게 막을 것인가 등의 생명윤리에 대한 깊은 고민이 앞서야 한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시대
얼마 전 착한 목자 수도회라는 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다, 라는 모토아래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수녀님들을 만났다. 미혼모들과 폭력피해 여성을 위한 사역을 하는 간증을 들으며 사회의 어둠에 대해 답답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회 한곳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고 있고, 다른 한곳에서는 한 사람, 한 영혼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살려보려고 큰 희생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생긴 아이를 임신한 나이 어린 엄마들을 위해 기도하고 대화하며 자존감을 높여 주고 주님의 마음을 알게 해주는 일을 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수녀님들. 어둠의 밑바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수녀의 신분으로 감당하려면 기도로 힘을 얻는 길 밖에 없다고 한다. 사람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전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한 채 가장 깊은 나락에서 악을 행하는 이들도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한 사람이 온 세상보다 귀한 것은, 주님이 만드신 영혼이기 때문이고 주님이 십자가의 피로 구원을 주신 영혼이기 때문이다. 어둠은 끝없이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많은 이들이 그 자극에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버리는 현실이다. 아니,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그 신성에 모독을 가하는 악행을 저지른다. 이제는, 인간 스스로가 생명을 멈추는 것에 대하여 법원이 허락하는 시대가 왔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불경스럽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주로 내주시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셨고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라고 소중하게 여기셨다. 그런데 인간들은 스스로가 만든 법과 질서로 하나님의 존귀한 권리인 생生과사死에 대해 판결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전쟁에 노출되어 있는 인류. 하루에도 몇 번씩 살인이라는 이름으로 사회면을 장식하는 사건 사고들. 폭행과 사기, 음란과 미움, 비판과 조롱. 한동안 큰 이슈로 유행처럼 번진 자살이라는 이름의 중죄까지. 세상은 말 그대로 지옥의 깊은 데를 열어 놓은 것처럼 번잡스럽고 어두운 요지경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부르시며 간절하게 주님의 마음을 알길 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향하여 노아시대와 같은 마음으로 한탄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 마음을 위로하고 그 뜻을 받들 이들이 절실해지는 이 세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하나님의 마음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험산준령을 헤매시고, 한 영혼이 회개하면 회개할 것 없는 아흔 아홉보다 기쁜 일이라고 말씀하시던 주님의 마음은 성경의 한 구석 이야기쯤으로 내몰리고 있는 시대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이제 그만 버리고 싶지만,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 있기에 조금 더 기다리시는 주님의 간절한 마음을 우리 인간들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곳곳은 잃은 양을 기다리시며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점철되어 있다. 예수님의 속죄 희생의 피가 마르지 않고 지금도 흐르고 있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속죄 희생으로 얻은 생명을 가볍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성경에 있는 많은 진리들이 왜곡되고 훼손되는 비참한 현실이 다가 올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인류를 향한 사랑에 마음이 아프신데 인류는 점점 십자가의 사랑을 논하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으니 탄식할 일이다. 고통을 줄이고자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것을 존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면 하나님의 주권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언제 임종할지 모르는 부모나 자녀 혹은 고통 가운데 있는 환자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마음은 이해된다. 오랜 기간 쌓여가는 경제적 부담과 시간적 부담, 고통 하는 환자를 바라보는 안타까움. 그러나 그 모든 고통이 환자와 보호자가 감내해야 할 연단이고 고난이라면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고통 받기만 원하시는 무지막지한 분이 아니시다.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헤아리며 천국을 소망하는 종말론적 신앙으로 다가서길 바라시는 분이시다. 사람을 사랑하시어 세상을 만드시고 독생자를 주시고 천국을 준비해두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회개하고 구원받아야 할 단 한 사람을 위해 기다려 주시는 너무나 착하신 분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기를 평강 가운데서 힘쓰라”(벧후3:8-9, 14).
주님은 말씀하신다. 사랑하며 기다리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점도 흠도 없이 거룩하게 자신을 닦으며 힘을 내라. 고통하고 괴로운 일이 있어도 천국을 소망하며 조금 더 인내하며 희생하라. 하나님의 평강 가운데 힘내라. 그리고 원수까지 사랑하라.
너무 크신 주님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길 원하며, 점도 흠도 없는 거룩함에 이르는 수덕생활로 한걸음 더 나아가리라 작은 마음 모아 기도한다.

세상에서 으뜸인 일은
기쁜 마음으로 나이 먹고
일하고 싶지만 참고
말하고 싶지만 침묵하고
실망스러워질 때 희망을 갖고
마음 편히 공손하게 내 십자가를 지는 일.

젊은이가 힘차게 하나님 길을 가도 시기하지 않고
남을 위해 일하기보다
겸손되이 남의 도움을 받으며
몸이 약해 아무 도움을 줄 수 없어도
온유하고 친절한 마음을 잃지 않는 일.

늙음은 무거운 짐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오랜 세월 때 묻은 마음을
세월의 무게를 담아 마지막으로 닦는다.
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이 세상에 나를 묶어 놓은 끈을
하나씩 하나씩 끊는 것은
참 잘하는 일이다.

세상에 매어 있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면
겸손되이 받아들이자.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기도’라는 가장 좋은 것을 남겨 두신다.

손으로는 아무것 할 수 없어도,
두 손 모으면 늘 할 수 있는 기도.
사랑하는 모든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시도록 빌기 위해

모든 것이 다 끝나는 날,
“어서 와, 친구야. 너를 결코 잊지 않았어.”
임종 머리맡에서 속삭이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