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채우기


윤중이와 함께 종일반 수업을 받는 현수는 12살의 뇌성마비 지체장애아입니다. 하교를 위해 오후 5시가 조금 넘어서 학교에 가면, 제 아이를 포함한 두세 명의 아이가 텔레비전을 시청하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만치에서 현수는 혼자 팔을 내저으며 ‘워워’ 소리를 냅니다. 그 소리가 더 커지면 현수 아버지가 온 것입니다. 현수가 기쁨에 못 이겨하는 소리입니다.
“아버님, 오늘도 현수가 바지에 쉬를 했어요. 기저귀를 안 차려고 해서 빼놨더니….” “아. 네~. 괜찮습니다. 현수야 가자.”
현수의 손을 붙잡고 가는 현수 아버지의 뒷모습 속에서 저의 모습을 봅니다. 파란 멍 자국이 아로새겨져 있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네 삶속에서는 크든 작든 각자에게 드리워진 파란 멍 자국이 있습니다.
H. 허나드가 쓴 『높은데서 사슴처럼』이라는 책에서 그녀는 ‘은총과 영광’을 맛보기까지 절망과 고통의 긴 여로를 지나온 과정을 뒤돌아보며 추억에 잠깁니다.
처음 낯선 여행을 시작했을 때, 그녀는 자기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그리고 자기가 겪어야 될 일들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한참동안 조용히 앉아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본 후에야 어떻게 그 모든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는지 놀라워하며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주님께 긴 여로에서 자신이 배운 것을 말씀드립니다.
첫째로 여행 중 제게 겪게 하신 모든 일들을, 그리고 그 길이 이끄는 대로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을 결코 피하려고 애써서는 안 되고 그대로 받아들이며, 제단 위에 나 자신의 뜻을 바치고서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작은 여종, ‘기쁘게 받아들임’입니다”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둘째로, 다른 사람들이 저를 반대하는 모든 것들을 참고, 조금도 씁쓸해하지 않고 용서하며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작은 여종, ‘사랑으로 참아냄’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셋째로 배운 것은 주님, 당신은 한 번도 저를 절름발이에다 약하고 비뚤어진 겁쟁이로 여기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제가 마치 주님이 약속하신 것을 모두 이루고 저를 높은 데로 데려가셨을 때 갖추게 될 그 모습을 이미 지닌 것처럼 대하셨습니다. ‘저처럼 여왕답게 예절 있고 우아하게 걷는 이는 없도다.’라고 진정 말할 수 있을 때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저를 보잘것없고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여왕이 된 것처럼 한결같은 사랑과 친절로 대해 주셨습니다.
넷째는, 삶의 모든 상황이 겉보기에는 아무리 비뚤어지고 찌그러지고 못생겼더라도, 사랑과 용서로 대하고 당신의 뜻에 순종하면 완전히 변모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주님은 고의로 우리가 그런 못되고 악한 일들과 부딪치게 하시고, 우리가 그것들을 변모시키기를 바라신다고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가 죄와 슬픔과 고통과 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 머물러 살아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그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시고, 또 그 체험을 통해서 우리 안에 사랑스런 특성들을 길러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신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 길이 악에 대응하는 최상의 오직 한 길이라고 믿어요. 그러니까 악을 가두어 다치지 못하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 있을 때마다 선으로 악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 삶속에 있는 파란 멍 자국을 지우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고 주어진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나아갈 때 주님은 자신을 나타내시며 인도해 주십니다.
희귀병과 싸우고 있는 남편과 아이를 저는 인생의 큰 짐으로 여기며 힘들어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연약한 이들을 맡아 잘 보살펴 줄 사람을 찾다가 너를 보게 되었단다. 그런데 건강했을 때는 이들을 사랑하더니, 병이 드니 멀리하는 네 모습이 안타깝구나. 이들을 잘 부탁한다.” 저는 울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원하시는 것은 큰 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작고 연약한 자를 사랑하기 원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니 가슴에 파란 멍이 든 작고 연약한 자와 그의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저의 가슴이 너무 작아서 그들을 품기에는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넉넉한 가슴으로 인도하고 계심에 감사합니다. 넉넉한 가슴이 되기 위해 지금은 비록 쓰리고 아플지라도 주님을 향해 제 두 손을 높이 들겠습니다.

박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