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후

큰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나시는 것을 보며 죽음과 사후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다.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면 지위고하, 빈부귀천의 구별 없이 누구나 죽는 것이 정한 이치지만 사후의 삶은 이 땅에서의 삶으로 결정된다.
예수님을 영접했는지 안 했는지에 따라 달라지고, 영접했다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에 따라 확실히 구분되는 곳이다. 그런데 나의 큰아버지께서는 너무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셨다. 때문에 큰아버지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고 영혼이 불쌍하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영접만 하면 무조건 천국은 따 놓은 당상이란 착각과 안일함 속에 느슨한 신앙생활을 한다. 또 내 부모, 형제가 잘 믿고 있으니 자신도 더불어 함께 천국에 갈 수 있지 않나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하셨다. 아무리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한들 누구나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거짓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다. 내 유익을 누리기 위해서 교회를 찾는 자들도 있고, 종교가 없으면 불안해서 위안을 얻으려 교회를 찾는 사람도 있다. 여러 가지 다른 이유를 가지고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주님을 찾는 자들에게는 천국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오직 주님을 심령 가운데 모시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만을 천국에 들이신다는 것이다. 때문에 거짓되고, 위선적인 신앙생활은 주님과 관계없는 신앙생활이기에 천국과도 관계없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신앙인으로 실상 우리들의 삶은 너무 형편없다. 주님의 복음을 너무 하찮게 여기는 오늘날 신앙인들의 삶은 세상이 걱정하는 수준까지 이르렀으니 주님이 천국에 들일 자들을 찾을 때 얼마나 고민하고 또 고민하실까? 잠시 머물다 가는 이 땅에서의 삶은 무척 중요하다.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잠 90:10)고 하셨는데, 이 짧은 이생에서의 삶이 영원을 좌우하니 말이다. 그 누구도 사후를 생각한다면 지금처럼 엉망으로 살지는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이 닥쳐왔을 때 굉장히 큰 두려움을 느낀다. 아마 사후의 영원한 삶을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후의 삶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죽음이 찾아오면 모두들 두려워 떠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영원히 받게 될 형벌을 생각하니 당연히 오는 공포일 것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14:10-12)하셨다. 누구든 사후 하나님의 심판에 앞에 서서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에 직고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지나간 시간이야 돌이킬 수 없지만 철저히 회개하고, 앞으로의 삶에 열심을 내어 영원이 기다리고 있는 사후를 즐거이 맞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