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복음의 열정과 기도의 사람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1492년 콜럼부스의 신대륙 탐험 후 인디언을 향한 선교문제는 서양의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유럽인들이 신대륙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인디언 학살로 인하여 선교에 막대한 장애가 되기도 했지만, 청교도 사회에서는 1636년 인디언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도록 법률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토착민이던 인디언과 백인 정착촌 사이에는 끊임없는 전쟁의 소용돌이가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과도기에 인디언 선교를 위하여 한 생을 바친 위대한 복음전도자요 하나님과 연합했던 경건의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폐결핵을 비롯한 온갖 병으로 가득찬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일하셨다. 그는 기도로 숨 쉬었고 기도로 움직였고 기도로 선교하다가 기도 가운데 숨을 거둔 사람이었다. 지나친 과로와 병으로 인해 29세라는 아주 짧은 생을 살았으나 후세에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과 생애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가 바로 미국 식민지시대의 인디언 선교사로 불리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이다.

우울한 어린 시절과 어둠의 터널을 지나
그는 1718년 4월 20일 미국 커넥티커트 주 헤이담【?5남 4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데이비드가 태어날 당시 미국은 독립 이전이었고 유럽 이주민의 정착생활이 한창일 때였다. 아버지는 불과 데이비드가 8살 때, 목사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14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인지 온순한 편이였으나 천성적으로 우울함과 낙담에 빠지기 일쑤였다. 유년 시절은 행복했다기보다 생각이 깊고 항상 죽음을 가까이에서 느끼며 영혼의 문제를 심각히 생각하며 자랐다.
뉴잉글랜드 대각성운동 기간(1740-1743)에 성년이 되었다. 기독교 가정의 한 진지한 젊은이로서 그의 고민은 부흥운동가들의 강조로 개인적 구원체험을 얻고자 할 때 시작되었다. 자신의 삶을 생각해볼 때 자기는 저주받은 사람들 중에 자기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단지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복음주의적인 설교가 그에게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자주 하나님께 반항했다고 말한다.
“나는 나를 구원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기분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의 반역을 생각해 볼 때 그는 저주받은 자 되기에 합당하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또한 자신의 죄악상에 비춰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피할 수 없다는 두려움은 그를 헤어 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몰고 갔다. 그는 이러한 문제들로 1년 이상을 기도와 금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매일을 거의 끊임없이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며 자기의 눈을 열어 죄악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방식을 깨닫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사람은 자기가 추구했던 목표에 이르지 못하면 낙심하게 된다. 절망에 이르러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할 때가 많다. 누구에게나 그런 갈림길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갈림길에서 낙심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복음의 본질들을 깨우치려고 몸부림을 쳤다. 때로는 절망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아무리 구해도 복음이 이해되지 않아서 “이젠 끝장이다. 내 인생은 끝났어.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어!” 중얼거리며 비탄함에 빠져 며칠 간 고통스럽게 보냈다. 그런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를 벗어 버리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다하며 기도를 하였다.

놀라운 신앙체험으로 인한 삶의 변화
자신의 모든 종교적 갈망이 자기중심적이며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이 없다는 것을 점차로 깨닫게 되었고 이러한 생각은 계속 그를 압박하였다.
주일날 저녁 어두운 숲속을 걸어가고 있을 때, 그의 영혼에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영광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떤 환상이나 어떤 형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그전에는 품지 못했던,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내적 이해, 혹은 견해였다. 뛰어남과 미(美)에 있어서 그것에 필적할 만한 것을 보지 못했다. 내 영혼은 하나님의 뛰어나심, 사랑, 위대함 그리고 완전성에 매혹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하나님에 의하여 사로잡힌바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이후 그의 삶은 놀라울 정도로 변화되었다. 지금까지 가졌던 가치관이 달라졌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온 몸과 맘으로 깨닫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인식하게 되는 아주 중요한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그래서 전에는 자신을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살고자 결단 하였다. 그의 기도 생활은 더욱 빛나기 시작했고, 기도 가운데 얻는 기쁨이 이 세상의 모든 기쁨을 능가한다고 고백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예일대학에 진학을 하였다. 그의 신학부 성적은 뛰어났고 사려도 깊었으며 분별력도 탁월했다. 2학년 때, 학생담당 교수가 기도모임 때마다 분위기를 어둡게 하자 브레이너드는 그를 은혜가 아주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오해의 소지가 되어 퇴학을 당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그의 연약한 심성에 많은 상처를 주었다. 그러나 놀라운 겸손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온유함을 배우는 계기로 삼고 세상의 명예와 학위 등에 대한 애착을 끊어 버렸다.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다
그는 경건생활을 하는 가운데 불쌍한 영혼들과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하기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교도의 구원을 위하여 뭔가 해야만 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였으며 그의 24번째의 생일을 금식과 기도로 바치기로 작정할 만큼 기도 열이 대단하였다. 날마다 거의 기도에 파묻혀 보냈다. 자신의 영적 교만을 자각할 때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회개기도를 하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심 같이 거룩하게 되고 싶었다.”고 일기에 적고 있다.

어떤 때는 말을 타고 숲속을 지나다가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새로 헌신하기도 했다. “오! 주님 당신께 나를 드립니다. 나를 받으시고 영원토록 당신의 것으로 삼으소서!” 한때는 영광의 세계를 사모하며 이 세상을 속히 떠나기를 원했지만, 복음에 대한 열정이 그의 가슴에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면서 그의 관심은 오직 이방인들의 개종뿐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살고자 했고,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고백하였다. 마치 사도 바울처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주린 양들을 찾아 나선 믿음의 개척자
1743년 스코틀랜드 복음전도협회 소속 선교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뉴잉글랜드의 스톡브리지 카우나믹에서 약 1년간 사역을 하다가, 펜실베니아 뉴저지의 델라웨어 인디언 사이에서 3년 남짓 복음을 전하였다.
그 시대의 인디언 선교란 정말 힘든 것이었다. 그 당시 인디언들은 착취와 노예와 죽임의 대상일 뿐 전도나 봉사나 사랑의 대상은 결코 아니었다. 한동안 독일의 루터교는 터키 사람들을 저주 받은 사람들로 취급했고,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길들일 수 없는 짐승 같은 야만인들로 취급했다. 미국의 개신교도 마찬가지였다. 아프리카 흑인들과 미국의 인디언들을 짐승 취급했고 잡아서 노예로 부렸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미개한 인디언들에게도 영혼이 있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던질 때, 하나님은 그에게 불쌍한 토인들을 향한 구원의 열정을 주시어 그들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게 하셨다.
사실 지역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선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백인에 대한 인디언의 반감이 팽배한 시기에 그들 가운데 들어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매순간 죽음을 직면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갈릴리와 유대 각 동네를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던 것처럼, 인디언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지 말을 타고 찾아갔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었다. 그들에게 말씀과 찬양을 가르쳐 주었고, 우상숭배를 그치게 만들려고 애썼다.
첫 선교지인 카우나믹에서의 환경은 말이 아니었다. 잠자리는 짚더미 속이었고 옥수수 죽을 먹고 굶기를 밥먹 듯 하였다. 굶주린 늑대들이 창궐하는 숲속에서 길을 잃어버려 온 밤을 누워있었던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말 한 필 의지하고 자신의 입이 아닌 통역을 통한 브레이너드의 복음 전파는 첩첩산중이었다. 그럼에도 이곳저곳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인디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다. 때론 단 몇 명을 만나기 위하여 하루 평균 30~40킬로를 여행했으며, 때로는 600킬로 심지어 1000킬로 이상을 여행한 적도 있다. 특별한 교통수단이 없던 시대, 체질적으로 약한 브레이너드에게 이런 전도 여행은 감당키 어려운 여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영혼 구령에 대한 집념과 열정 그리고 쉼 없는 기도는 그의 이런 사역을 가능케 하였다.

그는 결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역시 우리와 같은 죄인이며 연약함을 간직한 인물이었다. 광야에서 홀로 외로움과 우울증, 그리고 질병과 싸우며 괴로워했다. 그러나 그는 연약함 가운데서 하나님께 몰두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두려움과 고통의 연속이었던 선교지의 생활을 기도로 이겨 나가며 자기 삶을 헌신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하늘을 천장으로 삼고 짚무더기를 덮고 자면서도 기도를 중단한 적이 없었다. 어떤 때는 심장이 찢어지는 듯 한 고통과 각혈 중에서도 기도 생활을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침대에 누워 꼼짝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 곳에서나 항상 기도는 그의 식량이요, 음료였다.
어느 해는 3천 마일을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전도를 했다. 인디언들의 언어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 말을 타고 가는 동안 그곳 마을 인디언의 말을 배우기 위해 무인의 정글을 수도 없이 오갔다. 그는 그것이 힘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너무 지치고 기진하여 수도 없이 쓰러졌다. 홀로 인디언 선교를 하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고 굶주림과 추위, 노고 속에서 사역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래서 그는 영양실조와 폐결핵을 비롯한 거의 모든 질병을 몸에 지니게 되었다.
점차 그의 믿음과 수고가 인정되어 가장 살기 좋은 이스트 햄프톤 교회와 밀링톤 교회에서 담임 목사 청빙이 왔다. 하지만 그는 두 곳의 청빙을 모두 거절하고 일생을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인디언 선교에 헌신했다. 그는 인디언 양들을 심방하며 복음을 전하느라 광야의 위험을 감수하며 강행군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