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음란한 세대

 

인류는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사건을 시작으로 죄악을 향하여 쉼 없는 질주를 강행하고 있다. 그 속도는 첨단 문명이라는 21세기를 등에 업고 더욱 빠르고 쉽게 세상 구석구석에 뻗어나가고 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마저 음란의 손길이 틈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순결이 상실되고 있는 이 시대, 과연 인류는 무엇과 짝하고 있으며 어디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인가?
발람 선지자가 음녀들을 이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했던 그 사건은 비단 구약시대의 일만으로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된다. 사단은 지금도 사람들의 연약한 본성 즉 성의 욕구를 통해 음란을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이 멀어 그 악한 계략을 보지 못하고 있으며, 그저 당연히 흘러가고 있는 문화의 한 방면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있다. 이 얼마나 무섭고 놀랄만한 일인가? 죄악은 처음부터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작은 욕심들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그 죄가 장성하여 결국엔 사망으로 치닫고 마는 것이다(약1:15).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있어야 한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말아야 하며,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구해야 한다.

죄악이 관영한 사회
향락문화의 번창은 성도덕의 문란을 가져왔다. 인터넷을 통한 음란 사이트는 어느 정도 컴퓨터를 다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지하철이나 길거리, 극장 등 여느 곳에서든 자유롭게 도색 유희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더라도 음란에 대하여 얼마나 대범해졌는가를 알 수 있다. 성범죄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고 미성년자들의 임산과 출산, 낙태가 증가하고 기혼여성들이 이성 친구를 갖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최근 한 조사에 의하면 기혼여성의 55%가 외도 욕구를 느낀다는 충격적인 조사보고를 하였고, 기혼여성 22%가 남자친구가 있다고 보고되기도 했다.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은 자유와 개방의 물결 속에서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된 말이다. 적어도 성에 있어서 만은 말이다. 중고생들의 원조교제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고, 사회문제로 대두됨에도 그에 따른 대책을 마련하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정작 당사자인 중고생들의 의식 속에 윤리보다 쾌락과 물질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이 더 크게 부각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식을 누가 깨울 것인가? 만연된 음란의 물결 속에서 출렁이고 휩쓸리는 저 영혼들이 갈 길은 어디란 말인가? 음란이 자연스러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것이 결코 부끄러움이 아닌 즐거움이요 쾌락의 도구인 것이다. 하나님의 시선은 순결한 한 영혼을 찾기 위해 헤매고 계시다. 그 한 영혼이 없어 안타까운 즈음에 교회는 안전지대인가?

한 사람을 찾습니다
중세시대 교회는 부와 권력에 의해 비대해져 있었다. A.D 313년 콘스틴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을 계기로 핍박받던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다. 교회의 권위는 하늘을 치솟았고, 예전의 그리스도인들은 졸라맸던 경건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세상의 안일함과 나태 속에 젖어들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풍기 문란한 생활에 빠지고 만 것이다. 세속을 등지고 하나님과의 일치를 위해 일생을 바친 수도원에서마저 음란한 죄들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8세기 유럽은 극치의 향락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때에 일어난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분도 요셉 라브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주님을 위해 한 가지 규약을 세웠는데 음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여자가 내 몸에 손을 대면 그 부위의 살을 도려내겠다.’ 이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고인가.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위대한 결단이었다. 자신을 지키는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득죄하기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각오로 살아갔기에 단 한 사람이었지만, 주님은 분도 요셉 라브르를 통해 많은 깨달음을 주셨고, 그 깨달음은 시대를 깨우고 그리스도인들을 깨우는 경종이 되었던 것이다. 아씨시의 청빈양과 결혼한 프랜시스의 말이다. 죄악이 만연한 이 시대에, 교회 안에서도 라브르와 같이 자신을 지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한 사람이 있어야 하겠다. 그 한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위로를 받으시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이 교회를 깨우는 경종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순결
마태복음 5:28을 보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4:3-5을 보면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라”고 하셨다. 마음으로조차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간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이것은 철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순간순간 지배받을 수밖에 없는 사회에 사는 성도로서 마음속에 일어나는 순결을 거스리는 죄악을 그 순간 물리치는 단호함을 가지라는 것이다. 구별된 삶을 살라는 것이다.
‘누구나처럼 이 정도쯤이야’라는 생각으로 지나친다면 육신은 어느새 ‘순결쯤이야’라는 사고에 젖어 살게 될 것이다. 순간순간 순결을 거스리는 마음이나 행실에 지배받아 더러워진 감정, 의지를 철저히 참회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무엇보다 절제생활을 철저히 하면서 나아간다면 음란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은밀한 마음과 행실을 감찰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말고 깨어 기도하는 생활이 절대 필요하다. 아울러 육신적 순결뿐 아니라 영적인 순결을 지키기 위해 말씀 가운데 자신을 지키는 생활도 반드시 필요하다.

거슬러 올라가자
사회의 흐름과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그 시류를 따라오는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그 시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다. 음란의 시대를 거스르는 사람은 당연히 순결한 사람이다. 주님은 음란이 물결치는 이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 순결을 추구하는 성도를 찾으신다. 자신을 지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과 사회에 경종이 될 만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은 철저한 참회와 절제 속에서 탄생한다. 자신의 모습을 살펴 현재 어떻게 순결함으로 나아가는지 돌아보자. 순결치 못한 내 모습이 조금이라도 엿보인다면 그것 때문에 가슴을 치자. 순결한 한 영혼이 되기 위해 이 음란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