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QT를 하던 중 10대 기적재앙 사건과 바로에게 가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어오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숙제를 발견하게 되었다. 완고한 바로처럼 느껴지는 주일학교 2학년 남자 아이의 할머니가 떠올랐다. 매주 주일마다 달력에 숫자를 기록하면서 과자상자를 들고 아이의 집을 방문하였다. 때마다 더 완강해지는 바로처럼 할머니는 전혀 요동이 없었지만, 10번은 계속 방문하리라는 결단이 있었기에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8주째 되던 날 아이의 냉랭한 반응에 그만 풀이 꺾이고 말았다.

9주째가 되던 주일 오후에는 의무감으로 터덜터덜 아이의 집을 찾아갔다. 교회에 가자고 하자 춥다면서 머뭇거렸다. 물장난을 했는지 옷소매가 다 젖어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가자고 하니 갈아입을 옷이 없다고 하면서 현관 앞에 수북이 쌓아놓은 옷더미를 가리켰다. 마음이 짠했다. 아이에게 교회에 가자고 다시 권하자 방안으로 들어가더니만 주황색 티셔츠를 들고 나왔다. 젖은 티셔츠를 벗기자 내복 소매도 흥건히 젖어 있었다. 내복을 갈아입히고 양말을 신겨주었다. 한쪽 양말이 약간 비뚤어져서 무릎을 꿇고 다시 신겨주는데, 아이가 불쑥 전도사님은 내 종이잖아요.”라고 하였다. 순간 멈칫했지만 아이의 말에 기분 상하거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밖에 나오니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은 터라 빨리 가자고 하니 아이가 마음을 비우세요.”라는 말을 하였다. 마음이 뜨끔했다. 의무감과 불순한 욕망이 살짝 섞여 있는 나의 속마음을 들킨 것만 같았다.

허리통증으로 입원한 할머니가 월요일에 퇴원하신다기에 좋겠구나 하자 아이는 시큰둥했다. 할머니가 오면 7살 때 헤어진 엄마랑 전화통화를 할 수 없다고 한다. 측은한 마음에 아이의 손을 꼭 잡으면서 그렇구나. 전도사님 조카는 7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라고 하자 정말이냐며 조금 놀라는 듯 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밥을 챙겨주자 아이가 맛있다며 밥을 먹었다. 오후예배가 끝난 후 아이를 꼭 안아주면서 네가 오늘 교회에 나와서 정말 기뻤단다. 그리고 너랑 조금 더 친해져서 정말 감사하단다.”라고 하자, 아이가 전부터 친했잖아요. 다음 주에도 저 데리러 꼭 오세요.”라며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정확히 10주째가 되는 지난 주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그 아이가 교회 앞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앉아서 나를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불신과 교만이 감사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기적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그 순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나의 기대치와 야심이 너무 커서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을 놓치고 살아온 듯해 부끄럽기도 하였다. 솔직히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은근히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주목받고 싶은 영웅 심리가 있어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나타내 보이고 싶기도 했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애굽의 왕자보다 사환이 되길 원했던 모세, 가말리엘의 수제자나 로마시민으로서 특권을 누리기보다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기를 원했던 사도 바울, 귀족의 신분을 버리고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삶을 선택하며 벌거숭이가 되셨던 이사야 선지자. 예수님을 닮기 원하며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기 원했던 이들은 그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존경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모두가 하나님의 종으로, 가장 작은 자로 살아가는 것을 더 없는 기쁨으로 여겼다. 가장 초라한 음식을 먹고 누더기를 걸치더라도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이 되셨던 그리스도의 옷을 언제나 덧입기 원하셨다. 단번에 영웅적인 기적을 나타내어 사람들의 시선을 주목시키기보다, 어렵고 힘들고 수고로운 길을 선택하셨던 예수님처럼 느리고 더디더라도 철저히 모든 이들의 종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허세가 가득한 나는, 종보다는 곧잘 하나님의 일이라는 명분아래 그럴싸한 영웅이 되고 싶어 한다. 예수님을 태운 나귀새끼이기를 원했던 이용도 목사님은 세상 영화 다 버리고 종이 되어 골고다로만 주의 뒤를 따라갑시다. 주의 가시는 곳, 자국자국 눈물입니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고인 것은 쓴 눈물이 아니요, 단 사랑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폐결핵으로 3년밖에 살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고오베의 신가와에 있는 빈민굴로 들어가셨던 하천풍언. 그곳은 병자, 전과자, 도둑, 깡패, 창녀 등 일본의 밑바닥 인생들이 총 집합한 곳으로써 일본에서도 유명했다. 그는 수많은 이들이 꺼려하고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종이 되기 원하셨다. 그 속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결핵 환자의 용변을 도와 밑을 닦아주고, 또 버림받은 아이들을 돌보며 기저귀를 갈아주고 밑을 닦아주었다. 그의 아내조차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여러분들을 위하여 식모 한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제 아내이면서 여러분들의 식모입니다. 아무쪼록 도움이 필요한 분은 어려워말고 말씀해주십시오.” 자기를 비워 모든 이들의 종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얻을 수 없다고 하셨다. 우리는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이성이나 합리적인 사고를 앞세우며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모세의 자리에 앉아 상대방을 정죄하거나 심판할 때가 많다.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죄인인 위치를 망각한 채 일그러진 영웅이 되어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쉽게 격분하거나 노를 발하기도 한다. 상석보다는 말석을, 관직보다는 무관(無冠)을 원한다고 하지만 실상 은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는 영웅이 되고 싶어 한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선한 명분 아래 야심을 충성과 열정으로 포장하기도 한다. 자기 의에 사로잡혀 스스로 승리를 쟁취하려는 영웅심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하나님이 행하신 수많은 크고 작은 기적들을 내가 한 것인 양 우쭐거리기도 한다. 욕심에 이끌리어 믿음과 야망을 착각하기도 한다.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일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속일 수 없음을 잊지 말자.

성 알베리오네는 야심을 가진 사람이 훌륭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티끌만한 불순한 지향이나 야심이 있다면 결코 하나님의 순수한 사역자가 될 수 없다. 내 안에 불순한 동기와 야심의 빈껍데기를 벗겨내고 그리스도의 옷으로 덧입어야 진실한 종이 될 수 있다.

세상 영화 다 버리고 주님의 종이 되어 골고다로만, 주님의 길로만 가자. 굴욕을 당해도, 자존심이 상해도, 상대방의 오물을 뒤집어쓸지라도 이 땅의 일그러진 영웅이 되기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행복한 종으로 살아가자. 져야만 이기는, 낮아져야만 높아지는, 죽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 종이 되어야만 하나님 나라의 보좌에 앉을 수 있다. 영원한 하늘나라의 신비에 다다르기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을 비우고 또 비우며 달려가야만 한다. 종의 형체를 가지셨던 우리 주님의 거룩한 얼굴을 바라보며 교만하고 이기적인 나의 마음을 내려놓으면, 긍휼 가득한 주님의 손길이 임할 것이다. 상하고 찢긴, 혹은 지친 나의 마음에 가득 임하여 풍성한 힘을 주실 것이다. 그것이면 족하지 않을까.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