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향기를 열망하는 지도자

일 년에 두 차례씩 열리는 ‘참 목자 영성수련회’ 때 남원 동광원을 방문하여 많은 감동을 받았다. 지리산 서리내를 1시간 남짓 맨발로 걸어 올라가면서, 그 옛날 이현필 선생님의 발자취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눈 쌓인 지리산을 맨발로 걸어가시면서 복음을 전하시고 엄격한 절제와 철저한 수도생활을 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나 자신을 반성해보게 되었다. 그동안 수도 목회 한다고, 수도 선교한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울리는 꽹과리처럼 요란하게 부산만 떨었다. 자신을 성찰하면서 성화의 길로 가기보다는 목회라는 현장에서 일에만 몰두하면서 나름대로 주님의 일을 위함이요 충성이라고 생각했다. 어린아이와도 같이 철없는 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신앙적 영웅도 성공도 아닌 순결을 지키며 깨끗이 살고자 하는 소원이 동광원의 목표였다. 이러한 모토 아래 이현필 선생님과 그의 제자들은 일생 동안 주님 가신 길을 따르며, 자기완성(성화)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하나님의 일군이 되는 데는 일이 급한 게 아니라 먼저 자신의 영성을 살려야 한다. 영성이 죽은 자들은 타인의 영혼을 살려내지 못한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3-16).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 한다.”는 이 구절이 기독교 성직자의 표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적인 영역은 영적인 사람이라야 이해가 된다. 영적 사상은 영적 언어로만 표현이 된다. 성직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맑은 영성이다.

맑은 영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영적인 생활을 해야만 한다. 육적인 생활은 당연히 영적인 생활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맑은 영성을 살리고자 영성생활에 장애가 되는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 거룩함을 추구하며 영성으로 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짐승에 불과하다. 그러나 영성을 살리는 일은 그리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는 육신의 세력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며, 세상적인 행복을 배설물처럼 여겨야 한다.

영성이란 예수님의 성품, 인격을 가리켜 말한다. 예수님의 말씀과 생활은 언제나 신령한 삶이셨다. 신령하지 못한 것은 속된 것이다. 속되다는 것은 세상적이요, 육신적이요, 마귀적이요, 정욕적인 것을 가리켜 말한다. 영성이 사는 데는 도덕적 순결생활과 철저한 영성생활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광야 연단과정을 거치면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철저히 못 박아가야 한다.

이용도 목사님(1901-1933)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영이 평안 하려면, 육에 고통을 주라. 영이 귀해 지려면, 육을 천하게 하라. 영을 즐겁게 하려면, 육을 슬프게 하라. 육신의 명예는 영의 치욕이니라. 육신의 환락은 영의 비애니라. 남녀가 어울려짐으로 얻는 기쁨은 육에 속한 일이니라. 육에 죽고 영에 살고, 땅에서 천하고 하늘에서 귀하자.”

배고픔과 핍박과 가난과 추위와 불편함을 묵묵히 참으며 영적싸움의 흔적을 가지고 강단에 서셨던 주기철 목사님이 그리운 때이다. 칼바람이 부는 차가운 돌박산의 바위에 꿇어 앉아 밤이 새도록 참회의 눈물을 흘렸던 그 기도로 말미암아 신사참배로 표류하는 한국교회의 영적 버팀목이 되었다.

비안네(1786-1859)는 가톨릭 사제였지만 참 본받아야 할 영성의 지도자다. 그는 극도의 절제로 인해 뼈만 남은 듯 볼썽사나운 외모였고, 라틴어를 하지 못해 강단에 설 때마다 더듬더듬 거렸다. 하지만 영혼에 대한 애끓는 기도로 방탕과 타락에 찌든 아르스를 거룩한 마을로 변화시켰다. “주님, 저는 주님께서 제게 맡기신 양 떼를 잘 돌보지 못하는 게으르고 악한 종입니다. 그러나 주님, 제 교회의 회개를 허락해 주소서. 저는 주님이 원하시는 모든 고통을 일생 동안 참을 각오가 되었습니다. 저의 극기, 저의 단식, 저의 고통을 교회의 구원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육의 세력을 철저히 죽여 나갈 때,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영혼도 살릴 수 있다. 지식을 탐하고 지식에만 몰두하고 있는 이에게는 이러한 일이 불가능하다.

요즘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지식을 추구하고 외적인 성장에만 마음이 기우는 것 같아 같은 목회자로서 가슴이 아프다. 영성을 무시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청빈하고 순결하게 살아야 한다. 탐욕과 애욕을 이탈하여 청빈, 순결, 순명을 완성해야 한다. 성직자들은 특히 명예욕과 돈과 여자를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 이것에 걸리면 영성이 죽는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면 음란을 이기지 못한다.”는 동광원 김금남 원장님의 한 마디가 순결을 잃어가고 비대해져가고 있는 교회를 향한 일침처럼 들려진다. 배고픔의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그 한 마디가 나의 가슴팍에 깊이 박히는 것은 왜일까?

못나고 어리석은 이 죄인 또한 주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불충한 종이다. 은근슬쩍 육신의 명예와 평안함을 구하며 너무나 안일하게 목회를 해왔다. 겉으로는 “밝은 빛, 밝은 빛” 하면서 철저히 살아야 한다고 외쳤지만, 영혼들을 향한 애끓는 눈물의 기도와 믿음의 정절을 지키기 위한 엄격한 극기생활을 하지 못하였다. 빚 좋은 개살구처럼 그저 흉내만 조금 낼 뿐이었다. 이 땅에서 너무 귀히 여김 받아 저 하늘에서 천히 여김 받을까봐 심히도 두려울 뿐이다. 육체의 순결이든, 영혼의 순결이든 그 어느 것 하나 놓쳐서는 안 된다. 영적인 더 깊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져야 한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분주하여 회개 생활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 지도자가 되었다고 교만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먼지가 묻을 때마다 맑은 물로 또 씻고, 또 씻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죽을 때까지 그 일을 충실히 하다가 주님 앞에 서야 한다. 더 힘든 고통의 자리를 찾고, 더 맛없는 음식을 찾고, 더 거친 옷을 걸쳐 입고, 더 낮고 낮은 자리를 힘써 찾아야 한다. 양들을 어두운데, 냄새나는 곳으로 인도하는 영성의 향기 없는 허울뿐인 목자가 될까 심히 두려운 일이다. 남은 구하고 나는 버림받는 가련한 목자가 될까 두려운 일이다. 헛된 명예를 구하다가, 헛된 성공을 구하다가, 헛된 육정을 구하다가 내 영혼 시궁창에 빠져 사망의 냄새를 풍길까 두렵다.

선한 목자셨던 우리 예수님처럼, 종으로 거룩함을 매순간마다 추구하며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그 예수님을 닮아 익은 열매되기 위해 밝은 빛 가운데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누가 향기를 발할까 애타게 찾으시는 예수님 앞에, 착하고 순결한 양으로 서서 맡겨주시는 이들을 옳은 데로 잘 인도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 맑은 향기를 발하는 작고 낮은 종이 되고 싶다.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