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이 되어


며칠 전 존경하는 엄두섭 목사님께서 영성생활이라는 책을 보내주셨다. 100세가 다 되신 연세에 거동도 불편한데 손수 책을 만드신 것이었다. 목사님의 심정을 담은 불꽃이 되어라는 글을 읽으면서 목이 메고 눈물이 났다.

보시오. 일생 내 곁에서 나를 격려하고 위로해주던 내 동지 여러분! 인생 여정 광야 길에서 내가 쓰러지면 달려와 붙잡아 일으켜 주고, 눈물을 닦아 주기도 하였소. 그러나 형장으로 끌려가는 마지막 행렬 돌아보니 나뿐이었소.

보시오. 원수와 싸우다 부러진 내 허리, 악마의 화살에 멍든 내 오른 팔, 이제 내 나이는 100살이 되가는 파파 늙은이가 되어 가고, 늙고 병들어 걷지 못하고, 나는 인생 전투장의 패잔병이오. 내 임종은 혼자 하나님 앞에서만 죽어야지, 그 많은 구경꾼 보이려고 죽지는 않을 거요. 신은 나를 향하여 그래도 불이 되라 하오.

늙은 꼴 이래도 병든 몸 고쳐 주시진 않고, 남은 세월 다만 타오르는 불꽃이 되라고 하오. 활활 불티가 되어 죽으라 하오. 불기둥이 되어 아무것도 가릴 것 없이 타 오르다 타 오르다 불꽃이 되어 죽으라 하오. 남은 인생 지금 이 몸 이대로 다만 타오르는 불꽃이 되려오.

꼬부라진 폐물인간 이제는 인간쓰레기라고 멸시치 마오. 희로애락 따위, 성공실패 따위 초월하여 불이 되려오. 불꽃이 되려오. 인간만사 죄다 망쳐도 불꽃은 될 수 있소. 내게 자랑스럽던 옛 친구들 지금은 포도나무 곁에 다 드러눕고, 내 눈물 닦아주던 애처마저 나를 버려둔 체 훌훌 가버리고 인생무상이었소.

신의 사랑은 가혹이오. 그는 나보고 남은 세월 불의 화신이 되어 활활 타다 죽으라 하오. 사지백체 다 병신이 되도 마지막 남은 맑은 의식하나 부채질해서 불꽃을 날리라 하오. 인생 오장육부 다 마비 되도 나는 불꽃이 될 수는 있소.”

올 곧게 주님 위해 사신 한국교회의 탁월한 영성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미치게 해달라고 은성수도원에서 밤낮 부르짖던 목사님. 이제 그렇게 사랑하던 주님 곁으로 가실 날이 가까우셨나 보다. 몸이 마비 되도 남은 인생을 불꽃이 되리라는 고백이 나의 가슴을 적신다.

사하라 사막의 불꽃이 되어 살다 가신 샤를르 드 푸꼬의 교훈이 생각난다.

어떤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있을 때, 가장 사랑하는 분의 소망을 행한다는 것은 너무도 즐거운 일이어서 그 일이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조금도 괴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그분이 나에게 있기를 원하시는 곳에 내가 있는 것, 그리고 제일 그분의 마음에 드는 것을 하는 것. 그것뿐이다. 자신을 잊도록 하자. 그리고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그분 안에 살도록 힘쓰자. 왜냐하면 너도 알다시피 사람이 사랑하고 있을 때에 그는 자기보다는 사랑하고 있는 사람 안에 더 많이 살게 되고, 또 사랑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의 밖, 곧 사랑하고 있는 사람 안에서 삶을 영위하게 되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자기 안에 살기보다 예수님 안에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일에 관련되는 것은 죄다 잊고 예수님께 관계되는 것만을 생각하게 되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사랑을 청하자. 예수님께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고 말씀드리자.”

그의 일기장에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흔적들이 가득하다.

예배를 드릴 수 없다. 나 혼자이기 때문이다. 비관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누군가 오리라 희망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한 명의 그리스도인 여행자도, 한 명의 군인도, 혼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허가도 오지 않았다. 21년 만에 처음으로 성탄 전야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 하루, 이틀, 나는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가난한 사람 중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된 그는, 1910년 가장 사랑하는 사람 셋을 잃었다. 37세의 몬시뇰 게랑과 가장 친한 친구인 라크루아 중위가 죽었다는 소식을 같은 날 듣는다. 뒤이어 그의 영적 지도자 유블랑 사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결국 얼마 안 있어 그는 완전히 무너지고만다. “외로움이 점점 커진다. 그렇다, 나는 혼자다. 그래도 예수님은 계신다.”

경건하고 헌신적인 사제, 일에 익숙하고 계속해낼 수 있으며 나보다 더 잘 해내는 그런 단 한 명의 동반자를 열심히 바랬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러나 결단한다. 나는 죽지 않은 밀알과도 같다. 내가 죽어서 열매를 맺도록 기도해 달라. 나는 미래의 수확을 준비하기 위하여 복음서의 밀알처럼 사하라의 땅에서 썩어 없어져야 한다.

121, 58세의 그에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금요일 저녁이었다. 40명의 광신적 세누시스교도인 폭도들이 오두막집을 습격했다. 그들 중에는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한 투아레그인이 있었다. 그 배신자는 우편배달부인 척했고 푸꼬는 문을 열어 주었다. 그들은 그를 거칠게 밖으로 끌어내어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손을 등 뒤로 돌려 단단히 묶었다. 그의 오두막집이 약탈되는 동안 그렇게 웅크린 자세로 선교사는 말없이 기도를 올렸다. 그때 군인들이 나타나자 흥분한 폭도 하나가 그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아무 소리도 없이 푸꼬는 모래 바닥에 쓰러져 죽었다. 3주 후, 사람들은 착한 선교사의 시신이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내가 죽은 곳에 묻히고 싶다. 그곳에서 부활할 때까지 조용히 쉬고 싶다.” 군인들이 위대한 선교사가 죽임을 당한 곳에 도착했을 때 그의 무덤엔 이 작은 형제가 원한 대로 이름도 없이 나무 십자가만이 있었다.

그는 아무도 없는 척박한 사막에서 홀로 불꽃이 되어 타오르다가 한줌의 흙이 되어 사라졌다. 그의 최후는 외롭고 고독했지만 가장 가까이 주님이 그의 곁을 지키고 계셨다. 사랑의 불꽃이 된 그는 후대의 가슴에도 진실한 헌신과 충성과 겸손과 사랑이 무엇인지 깊이 새겨놓았다.

몇 달 전 중국을 다녀온 뒤로 두통과 안압이 심하여 수실에 누워있는데, 어둠이 온 마음과 몸을 휘감았다. 신음하며 고통에 울부짖을 때 주님은 내게 엄두섭 목사님과 샤를르 드 푸꼬의 마지막 인생이 남긴 가을편지로 흔들어 깨우셨다. “너도 저들처럼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도, 불꽃처럼 활활 타다 재가 되어라. 빈 손 들고 내 앞으로 나오라. 이 길은 외롭고 고독한 길이다. 온 몸이 불덩이가 되어 고통 속에 거할지라도 나만을 바라보며 나만을 사랑하며, 나만을 의지하며 썩어질 육신에 눈물짓지 마라. 사랑의 불꽃이 되어라.”

고통이 깊어가는 만큼, 외로움이 더 짙어가는 만큼 주님은 가장 가까이에 계시다. 비록 이 육신덩어리는 늙고 병들었어도 남은 인생 불꽃이 되어 타오르리라. 귀뚜라미 울어대는 밤, 마음 가득 눈물을 담고 우리 주님을 불러본다.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