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가 지원하고 있는 캄보디아 선교 박용환 선교사님의 글입니다.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

캄보디아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된 지 백년이 넘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백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데, 왜 기독교가 그 긴 기간 동안 뿌리를 내리지 못했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백여 년 전 개신교의 복음이 전파된 한국과 큰 차이가 없는데, 대한민국은 큰 부흥을 이루어 복음의 꽃을 피우고 오히려 전 세계에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그런데 캄보디아 기독교회는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최근 한국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의 헌신적 사역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 나라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부흥하지 못한 이유는 순교의 피가 없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터툴리안은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렇다. 이것은 진리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냥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순교의 피가 뿌려졌는지 모두가 다 아는 역사적 사실이다.

나는 종종 복된 순교자들을 생각해본다. 오늘날 한국 땅의 교회 부흥은 일찍이 박해시대에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저버리지 않고 죽음으로 믿음을 지켰던 순교자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받은 고귀한 신앙의 유산인 것이다.

기독교는 철저히 희생의 종교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희생으로 수많은 죄인이 구원을 얻었다. 한국교회 역시 믿음의 선진들의 숭고한 순교신앙 덕분에 자리매김하였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십자가 희생과 순교정신과는 거리가 먼 기복주의나 현세주의로 기울어 간다는 것이다.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캄보디아의 언어인 크마에어를 공부하면서 순교희생이라는 단어를 찾았더니 순교란 명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희생이라는 단어는 있지만 그 의미가 한국말처럼 깊이가 없다. 공부시간에 현지인 크마에어 선생에게 순교라는 단어가 있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게 뭐냐고 되묻는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것.”이라고 자세히 설명을 하자, “꼭 그렇게 신앙 때문에 죽어야 돼요?”라고 되물어서 쓴웃음 짓고 말았다.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희생정신이나 신앙은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지켜내야 한다는 영적 가치관이 없는 것이다. 섣부른 판단일지는 모르지만 아예 그런 개념이 없는 것 같다.

우리 모두가 진정 사모해야 할 신령한 복은 절대 공짜가 없다.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그 무엇을 얻었다면 그것은 아주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성경을 보면서 깨달은 사실은 신령한 복은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받는 것이고, 내게 소중한 것들을 주님께 드려야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신령한 복 받기를 원한다면 예수님과 위대한 성자들을 본받아 먼저 거룩한 희생을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의 핵심진리도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지 않은가!

이 나라에 복음이 오래 전 전파되었지만, 거룩한 희생과 순교의 피가 없었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고 굳건히 세워지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프놈펜에 있는 어린이 전도협회 지부를 방문했을 때 알게 된 사실이다.

십여 년 전 어린이전도협회에서 이곳으로 파송한 한 선교사 가정이 비행기로 이동 중에 안개가 가득 낀 깜폿주 복고 산에 충돌하여 가족이 모두 사망하는 불의의 사고가 있었다 한다.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캄보디아 내의 선교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그 선교사 가정의 불의의 사망사고를 순교적 희생으로 평가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잠시 숙연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기독교는 값진 피로 세워진 종교라고 말 할 수 있다. 죽어서 한 알의 밀알 되어 흘리신 예수님 보혈의 공로로 교회가 탄생하였고, 죽기까지 충성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의 피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굳건히 세워져 가고 있는 것이다.

캄보디아 박용환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