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나의 피난처

입김이 뿜어져 나올 때마다 그대로 얼어버릴 것 같은 정말 추운 겨울입니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니 봄은 오지 않고 겨울만 계속 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매섭게 몰아치는 한파처럼 고된 시련으로 앞날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매서운 한파를 보니 주님을 만나기 전 제 삶에도 살을 에는 듯한 추위 보다 더 모진 병마가 남편과 아이를 휘감던 그 날의 절망이 생각납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고 내일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던 그 날, 봄의 전령사처럼 주님은 제 삶에 찾아 오셨습니다.

교회 출석한지 2년 남짓 되어갈 즈음 담임 목사님이 읽어보라고 빌려주신 책이 코리 텐 붐의 『주는 나의 피난처』였습니다. 책을 한 번 쭉 훑어 본 저는 그대로 책장에 꽂아 버렸습니다. 당시 저는 그녀의 가족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 받는 유대인들을 위한 은신처를 만들고 안전한 피난처로 안내하다 결국에는 나치에게 발각되어 독일의 잔혹한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는 내용에 화가 났습니다. ‘주님은 이런 고통은 피하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책을 다 읽지 못했기에 죄송한 마음에 드리지도 못하고 1년쯤 보관하고 있는데 목사님께서 책을 찾으셨습니다. 다시 부랴부랴 책을 잡고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제야 저에게 들려주고자 했던 메시지가 가슴에 부딪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망과 소망을 잃은 채 죽음의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을 감싸 안으면서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은혜로 감사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또한 피난처 되시는 주님만 의지하여 믿음으로 사는 삶이 결국 더 깊고 넓은 삶의 성숙을 이룬다는 것을 말입니다.

근간에 마음을 살피던 중 집안 내력인 유전병을 숨긴 시댁 식구들에 대해서나, 말이나 행동을 통해 생채기를 낸 분들에 대해 여전히 불편한 마음을 지닌 채 살고 있는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오래전 읽었던 코리 텐 붐 여사의 삶을 돌아보며 새롭게 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미국의 포틀랜드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강단에 오른 코리 여사는 “저는 살인자입니다.”라는 말로 첫마디를 열었습니다. 그녀가 강제 수용소에 있을 때 매일 보는 간수 한 명이 있었는데, 그는 벌거벗긴 채 샤워실로 끌려 들어가는 죄수들을 조롱하고 비웃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벌거벗은 채 그 사람 앞을 지나가는 게 무척 수치스러웠습니다. 마른 살갗에 갈비뼈들이 앙상하게 드러난 언니의 모습을 볼 때마다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때마다 그녀의 세포 하나하나가 그에 대한 분노와 미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가 사악한 행동을 한 번씩 할 때마다, 미움도 하루하루 커져만 갔습니다.

이후 감옥에서 석방되는 날 그녀는 독일을 떠나면서 다시는 독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맹세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에서 강연을 해 달라는 초청을 받자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주님의 강권하심으로 그 땅을 다시 밟게 되었습니다. 첫 강연은 ‘용서’에 관한 것이었는데, 강연 중 강제 수용소에서 보았던 그 간수가 청중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너무나 끔찍스러웠고, 마음 안에 가라앉아 있던 분노가 다시 끓어올랐습니다. 빡빡 깎은 머리와 몸은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지고 병이 걸린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그는 강단에 선 그녀를 못 알아보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얼굴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강연을 마치자 그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로 다가와서 말을 하였습니다. “코리 자매님, 하나님의 용서를 생각하면 대단하지 않습니까? 자매님이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모든 죄가 저 바다 밑에 가라앉아 버렸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면서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녀가 석방된 이후로, 자신을 투옥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얼굴을 마주대하고 만나보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 그녀는 조용히 주님께 말했습니다. ‘저는 도저히 이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저와 저희 가족에게 행한 것을 생각하면 정말 밉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저로서는 그게 불가능하지만 당신께는 불가능이란 없지요. 그러니 제가 이 사람을 사랑해야만 한다면, 그 힘은 당신에게서 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제겐 온통 미움밖에 생기지 않으니까요.’ 그녀의 내면의 갈등을 전혀 눈치 못 챈 듯 그는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습니다. “자매님은 강연 중에 라벤스브루크를 언급하셨죠. 저는 거기서 간수 노릇을 했답니다. 하지만 그 후에 저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지요. 제가 그 곳에서 저지른 잔인한 일들을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다는 걸 알지만, 자매님의 입을 통해서도 그 말을 듣고 싶습니다. 자매님, 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그녀는 여전히 감정의 소용돌이에 갈등을 겪고 있었지만, 주님께 조용히 다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그녀의 마음 가운데 “코리야, 손을 내밀어라.”라는 주님의 음성이 강하게 들려오는 듯 하였습니다. “제 인생 중에 가장 하기 힘들었던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암울한 가운데 주님께 잠잠히 순종해 왔던 그 모든 세월을 다 쏟아 부어야만 했습니다.” 그에게 손을 내밀자 아주 놀라운 일이 그녀에게 일어났습니다. 단순히 그렇게 순종을 하고 난 뒤 그녀는 마음 가운데 뭔가 따뜻한 기름 같은 것이 쏟아 부어지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도 분명한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잘 했다, 코리야. 모름지기 내 자녀라면 그렇게 행동해야지.’ 그리고는 그녀의 마음속에 있던 미움이 스르르 녹아 없어져 버렸습니다. “마음에 미움이 가득했던 한 살인자가 이렇게 해서 다른 살인자를 부둥켜 안았지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말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일3:15). 저 또한 살인자이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을 사랑하노라고 하면서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죄가 아니라 죄인이 될 때 우리 역시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봄이 되면 어김없이 대지에 숨은 생명이 움트듯이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만져주실 때 우리의 본성이 변화 되어 주님의 생명으로 새로워 질 것입니다. 정말 봄이 기다려집니다.

박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