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헬몬산 자락에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으로 가실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님이 저에게 “그러면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신다면, 베드로 사도처럼 자신 있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입니다”라는 신앙고백을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들어야 하고, 사나 죽으나 신뢰하고 복종해야 하는 단 하나의 유일한 말씀이 있다. 그것은 성경에 의해 증거 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20세기 들어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이라 일컬어지는 ‘바르멘 신앙고백문’의 일부입니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독일을 휩쓸던 시절에 이 고백으로 칼 바르트는 교수직을 잃었고, 본 회퍼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습니다.

저에게는 ‘사나 죽으나 신뢰하고 복종해야하는 예수님’이라는 신앙고백이 관념에만 국한된 위선적인 고백이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외아들인 윤중이가 누워 지내면서부터 울지 않고 잠든 날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병으로 인해 동반되는 강직으로 아이가 새벽 3-4시경까지 고통스러워하며 잠들지 못할 때 다리를 주무르며 주님을 목 놓아 부릅니다. 아이가 숨을 가쁘게 몰아 쉴 때면 아이를 안고 두려움에 목 놓아 웁니다. ‘윤중이와 저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어떠한 질병도 능히 고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데 왜 안 오십니까?’ 저의 모든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벽 앞에서 신앙고백은 실종되고 맙니다.

게리 웬즈라는 분이 예배자로서의 삶은 내가 알지 못하는 회색지대를 인정하고 끌어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뜻과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회색지대를 인정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끌어안는 것이 신앙고백이요, 예배요, 순교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에 지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믿으라고 하십니다.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나를 믿으면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깊은 절망과 상실감과 고통의 끝자락에서 겨자씨만한 믿음을 자라게 하시고 예배를 가르치시는 주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역경이 닥칠 때마다 일어나는 강한 이기심과 반발심으로 실패를 거듭하는 자신을 볼 때면 절망은 극에 달합니다. ‘아! 이제 더 이상은 못 하겠어요’라며 쓰러져 있을 때 주님은 오셔서 나직이 말씀하십니다. “미선아, 선을 행하며 낙심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단다. 네 속에 착한 일을 시작했으니 그날까지 반드시 내가 책임져 줄께. 힘을 내거라. 사랑한다, 얘야.” 그 주님이 아니면 지금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자녀가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폭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폭에도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엄마가 되어보니 ‘자녀에게는 나의 생명까지 줄 수 있겠구나’라는 것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이구나’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어떠한 언어의 능력으로도, 억만 분의 일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주님께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고뇌와 의문 속에서도 주님 곁에 있고자 하는 마음뿐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싶은데, 저의 사랑은 순수하지 못한 이기적인 사랑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치울 수 없는 불신의 돌, 두려움의 돌, 게으름의 돌, 이기심의 돌, 교만과 아집의 돌등 딱딱하게 굳어있는 돌들을 힘들어도 순종함으로 치우고 치우는 삶이 바로 순교자의 삶이요, 예배자의 삶이라 생각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참으로 자비로우신 예수님은 우리가 내면에서 겪는 갈등과 절망의 세계를 이해하십니다. 주님을 의뢰하고 갈등과 절망을 향해 달리며 내 주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을 때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예수님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박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