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이 땅에 최고로 가난한 모습으로 태어나셔서 가난이 주는 겸손과 절제의 미덕을 몸소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가난이 저주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기독교의 정신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가난과 질병은 그 영혼이 예수님께로 향하게 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유하고 건강하니 세상을 즐기고 싶고 누리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어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성전 뜰만 밟는 껍데기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므로 하나님께 복 받았다 자처하면서 영적으로 가난하고 병들고 눈멀게 된 것을 알지 못하니 그보다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가난함으로 부지런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우니 성실해지고 근검하고 절약하는 가운데 무절제한 정욕생활로 해이해졌던 마음이 바짝 근신하는 마음이 됩니다.

삶의 여유가 생기면 세상으로 눈길이 쏠리기 쉽습니다. 남들이 집단장을 어떻게 하고 사는지, 옷은 어떻게 입고 다니는지, 가방과 신발도 아직 쓸 만한데 새로운 물건에 눈길이 가고, 자녀들 사교육을 어떻게 시킬 건지, 세상살이를 어떻게 하면 재미나게 할 궁리를 하는 것입니다.

유난히 인사치레하기를 좋아하던 사람이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정말 죽을 맛입니다. 친척이나 교우들 집을 방문할 때 빈손으로 간다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는 사람이 환경이 여의치 않아 그렇게 하지 못할 때, 구역헌금을 늘 만원 하다가 3천원밖에 못할 때의 그 씁쓸함이란….

주기를 좋아하고 나눠주기 좋아하면서 즐거워하는 마음속에 자기 의가 빼곡히 쌓여 가고 있음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내 영혼의 거룩과 성화를 위해서 가난의 은사를 허락하신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삶의 여유로움은 정욕이 내 심령마당에서 맘껏 뛰어놀게 하는 통로였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내 영혼의 주인 되시게 하려면 세상의 물욕과 탐심과 욕심들을 다 몰아내야만 합니다. 장성한 믿음까지 성장하신 분들은 물질의 풍요로움 속에서도 범죄 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물질을 쓸 줄 알고, 절제하며 겸손하게 삽니다. 그런 그릇이 준비된 분에게 하나님은 물질을 허락하십니다. 물질을 자기를 위해 쓰지 않고, 남을 위해 주님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그릇을 닦으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가난하면 세상 염려와 불평이 많아질 것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풍족할 때 세상걱정과 염려가 더욱 많음을 보게 됩니다. 가난하니 단순해지고 그날그날의 양식을 위해서 기도할 수밖에 없으니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무릎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멋진 계획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난 프랜시스는 23세에 기사가 되어 공명을 떨치고 싶은 마음에 아폴리아로 진군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너는 주인과 종, 둘 중에 누구를 따르려느냐”라는 주님의 신비한 음성을 듣고, 주인 되신 주님의 뜻을 따라 고향 아씨시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프랜시스가 홀로 가파른 언덕에 이르렀을 때 성령의 큰 감동으로 큰 영적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 후로 그는 모든 세상 줄을 끊고 주님을 위해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을 합니다. 24세에 프랜시스는 아씨시의 거리를 다니면서 성전 수리를 위해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다가 필요한 건축 재료들이 생기면 그것을 손수 어깨에 메고 와서 성전을 수리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프랜시스의 열성과 희생적인 생활을 보고 감동을 받은 다미안 성당의 노사제는 프랜시스에게 음식을 날라다 주었습니다.

이러한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프랜시스는 “내가 그토록 바라던 청빈생활이 이런 것인가? 아니다. 참으로 가난한 사람은 문전걸식을 하면서 고난을 받아야 되지 않겠는가? 지금부터라도 내가 할 일이 그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프랜시스는 마을로 내려가서 그릇을 들고 집집마다 구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추기경 우골리노가 처음으로 외국인들을 초청한 공식 회식에 프랜시스도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막 식사를 시작하려고 하는 참에 구걸하고 돌아온 프랜시스가 갑자기 나서더니 자기가 구걸 다니면서 얻은 빵 찌꺼기를 한 아름 들고 둘러앉은 점잖은 손님들 앞에 나눠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빵조각은 보리떡으로 여러 날 묵어 바짝 마른 것이었습니다. 프랜시스는 무척 즐거운 표정이었지만, 그날 손님들을 초대한 추기경은 그의 지나친 행동에 완전히 당황하여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그러나 거기 모인 손님들은 모두 작은 가난한 자가 나눠 주는 이 보리떡을 크게 기뻐하며 받았습니다. 식사가 끝나자 불쾌했던 추기경은 프랜시스를 불러 타일렀습니다. “친구여, 당신은 오늘 우리 집 손님인데 어째서 나가서 구걸하여 나를 그렇게 망신시킵니까? 우리 집도 이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도 모두 당신 것이라는 것을 모릅니까?”

그러자 프랜시스는 대답했습니다. “각하. 청빈보다 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을 위한 사랑 때문에 이 지상에 있는 동안 그렇게 가난하게 지내신 만물의 스승의 정신을 이 댁에서 존경하는 일은 각하를 망신시키기보다 도리어 명예로운 일이 아닐까요? 더구나 저는 우리 수도회의 형제들 중에 현재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구걸하러 나가는 일을 멸시하는 형제들이 생겨날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 해 둔다면 걸식 탁발수행을 망신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라 여기는 일은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하나님 앞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정신이라는 사실을 내 행동으로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신 가장 부유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심은 그 가난이 축복이며 영적으로 복 받는 길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 주신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환난과 고난을 통해 영적인 풍요와 부요함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멋진 계획을 발견하는 영적인 눈이 뜨이길 소원합니다.

이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