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섬진강 근처 작은 마을에서 소그룹 모임이 있어 며칠을 묵게 되었다. 눈이 내리던 이튿날 밤에, 어머니께서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찾아오셨다. 어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눈길에 오신 것이다. 눈길에 춥고 미끄러우니 주무시고 가시라고 그곳에 계신 분들이 어머니를 붙드시자 내가 묵고 있는 방에서 주무셨다. 허리가 굽으신 어머니께서는 반드시 눕질 못하시고 옆으로 누워 새우잠을 주무셨다. 팔십이 넘으신 어머니, 희미한 불빛에 비쳐진 눈가에 깊게 패인 주름살을 보면서 무엇인가 말 못하시는 과거의 한 맺힌 인생이 있음을 느꼈다.

어머니의 눈물

20년 전 어머니는 큰 상처를 입으셨다. 아들이 결혼한다고 그렇게 행복해 하시던 어머니, 아들을 위해 집을 장만하고 많은 분들에게 축하도 받고, 이것저것 장만하느라 기쁨에 겨워하시던 그때, 일주일 다가온 결혼을 포기하고 주님만 위해 산다고 집을 떠나버린 아들 때문에 큰 충격을 받으셨다.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많은 생각을 했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큰 은혜를 주신 그 사랑이 너무도 크고 감사해서 부모님과 형제들, 일가친척, 친구 그리고 교회 성도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도바울과 프랜시스 성인, 썬다싱 성인 그리고 스승님의 빛 된 삶을 듣고 깨닫게 되자, 이 세상에 명예와 권세, 부귀와 영화가 모두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던 그날 밤, 어머니가 제일 마음에 걸려 밤새 울었다.

“죄송해요. 용서하세요. 저를 위해 그렇게 고생하며 살아오셨는데, 그래도 저는 가야해요. 더 영원한 행복과 더 가치 있는 것을 주님께서 깨닫게 해주셨으니, 더 이상 허망한 이 세상의 것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요. 그동안 제가 찾던 참된 길을 주님께서 알려주셨어요. 그렇게 공허한 제 삶에 참된 진리를 깨닫게 해주셨어요.

엄마를 생각하면 저도 가슴이 아파요. 그래도 저는 가야해요. 주님께서 저를 수도자로 부르셨어요. 저도 수도자가 뭔지 아직 잘 몰라요. 그저 주님을 위해 사도바울처럼 가정을 갖지 않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래요. 저도 결혼해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주님의 종이 되어 어머니를 모시고 자식 낳고 그렇게 소박한 목회자가 되려고도 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저를 수도자로 부르셔서 거친 광야로 이끄셨어요.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만 사랑하는 그 길로요. 저도 두려워요. 그래도 강권하시는 주님 사랑을 뿌리칠 수는 없어요. 주님의 사랑은 제 삶을 변화시켜 더 영원한 나라에 참된 기쁨을 알게 해주셨어요. 그 사랑을 잊을 수가 없어요. 엄마! 정말 죄송해요. 저를 놓아주세요. 이 담에 천국에서 만날 때 주님께서 갚아 주실 거예요. 부족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저도 늘 잊지 않고 기도할게요.”

집을 떠나 온지 어언 20년이 넘었다. 고독한 광야에 어두운 밤이 되면 그렇게 그립던 어머니. 그런 모진 세월을 지나 더 늙으신 어머니. 더욱 슬픔으로 깊어진 눈가에 주름살, 백발에 앙상한 겨울나무껍질처럼 차가운 손을 잡고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저희 어머니를 지금까지 지켜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 모자를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시고 언제나 주님 품안에서 살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또 저의 어머니를 주님 손에 부탁합니다.”

견딜 수 없는 감정을 억제하며 그 날 소리 없이 울었다. ‘무정한 사람! 죄송해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이제 또 가야 해요. 인정에 메일 수 없는 주님의 종이기에 또 저는 떠나야 해요.’ “왜 양말도 신지 않고 이 엄동설한에 맨발로 다니느냐” 하시며 지팡이를 잡고 눈물을 닦으시는 어머니를 뒤로한 채 그곳을 떠나왔다.

주님 한분만으로

주님을 따르는 길은 법궤를 메고 벧세메스로 가는 두 암소와 같이 인정에 메일 수 없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부모나 형제나 이웃을 주님보다 더 사랑할 수 없다. 주님을 먼저 더 사랑하고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의지할 때 우리 영혼이 잘되고 덤으로 모든 범사도 책임져 주신다.

특별히 수도자는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한 자들이다. 세상에 수많은 기쁨과 행복이 있지만 지나고 보면 허망한 것이다. 물거품과 같은 것이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구속의 비밀과 주님의 측량할 수 없는 뜻을 깨닫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위해 사셨다. 자신의 명예와 권세, 가정의 일락을 다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셨다. 프랜시스 성인도 그 사랑에 감격하여 아버지의 그 많은 유산을 다 포기하고 마지막에는 옷 한 벌까지도 다 벗어주고 주님만 따랐다. 인도의 성자 썬다싱도 그러셨고 이용도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도 그러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크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나를 수도자로 부르셨던 것이다. 나같이 부족한 죄인을 이 마지막 때 요셉과 같이 환난 날을 준비하라고. 성경의 핵심진리를 깨닫게 해주시고, 진리로 무장하고 철저한 영성훈련을 받게 하셔서 환난 날에 많은 백성을 옳은 대로 인도하라고 부르신 것이다.

주님 오실 때가 임박했는데 이 백성들은 알지 못한다. ‘평안하다’, ‘안전하다’하며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가며 사고팔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져 살아가고 있다. 불쌍한 사람들을 바라볼 때면 왠지 눈물이 난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특히, 주의 종들이 좋은 음식, 좋은 집, 좋은 자가용, 자기의 인기명예와 배를 신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눈물이 난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얼마나 애가 탔으면 창자가 끊어지도록 울었을까?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애2:11). 예루살렘 거리거리를 다니며 울며불며 “회개하라!” 외치며 빨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그렇게 목이 터져라 외쳤건만 무지한 백성들은 귀를 틀어막았다.

“괜찮다. 더 잘 살게 될 것이다.”라며 백성들을 미혹하여 끝내 멸망으로 빠뜨려 버린 저 거짓선지자들과 지도자들. 아,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그와 같이 가고 있으니 어찌 울지 않을 수 있으랴! 복, 복, 복 밤낮 땅의 복을 말하는 저 거짓 복을 말하는 저들. 영원한 복을 알지 못하고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지 않고 있으니 가슴이 찢어지고 창자가 터질 것 같다.

장차 망할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시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하시며 우셨던 예수님.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얼마나 아프셨을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면 자꾸 눈물이 난다. 아침 신문에 웃고 있는 어느 목사님의 사진을 봐도 눈물이 난다. 어디를 바삐 걸어가는 사람을 봐도 눈물이 난다. 자꾸만 눈물이 난다.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