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만 니 외손녀 간증2

나의 기쁨을 여전히 지켰노라

갇힌 자 같으나 자유한 자

1952년 외조부님(워치만 니)이 감금되기 전 교회 일로 홍콩에 가신 적이 있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은 외조부님에게 대륙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곳에 가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리라고 말했다. 하나님이 정한 길에 대하여 그는 매우 분명했다. 들림 받는 것이 아니면 순교하는 길이었다.

홍콩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상해의 제람교 감옥에 투옥되었다. 1967년 15년의 형기가 차자 정부는 신앙을 포기할 것을 공개적으로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외부 사람들에게 워치만 니가 신앙을 포기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이 그에게 또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주님은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 보배로우시다.

주님에 대한 충성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포기하였다. 감옥에서 15년형을 마치고서 기꺼이 주님을 위하여 죄수가 되려고 했다. 그때의 공개적인 태도 표명의 불사는 더 큰 핍박을 가져왔다. 이러므로 외조부님은 두 불량배 형사범과 함께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들의 임무는 신앙을 포기하게 하는데 있었다. 더 심하게 학대할수록 그들은 더 큰 공을 세우게 되어 있었다.

옥중에 있는 어느 난우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외조부님의 솜으로 만든 조끼가 그들에 의해 여러 조각으로 찢겨졌다고 한다. 형기가 차도 그들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자 비밀리에 외조부님을 상해 근교에 있는 청포현 청동노계 농장으로 이감하였다. 이 기간 동안 외조모님은 외조부님을 한 번 볼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소식이 끊어져 수개월 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 후에 알게 된 것은 외조부님이 더 고통스러운 장소인 안훼이의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백모령 노계농장으로 이감되었다는 것이었다.

나와 함께 갇힌 자

1971년 11월 외조모님은 중풍으로 돌아가셨는데 이 일 전에 외조모님은 외조부님과 편지하도록 약속했었다. 한동안은 편지 연락조차도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그 당시 외조부님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외조모님은 중풍에 걸릴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정확히 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것 또한 세상에 있을 때 주님께 구한 바였다. 매우 심각한 고혈압으로 인한 심장병을 앓았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중풍으로 죽을 것을 알았으므로, 중풍이 발생한지 얼마 안 되어서 빨리 주님께 갈 수 있기를 바랐다. 이렇게 될 때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외조모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 갈망을 이루어 주신 것으로 인해 감사드린다. 중풍으로 혼미케 될 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시간은 정확히 삼일이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외조모님은 매우 평안했으며 아무 고통 없이 주님께 가셨다. 외조모님이 돌아가신 후 우리는 외조부님에게 즉시 그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이는 외조부님의 심장이 매우 쇠약하므로 그 소식으로 인한 타격을 감당치 못할까 보류했던 것이다. 일 개월이 지난 후에야 외조부님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러나 외조모님의 병환이 위독해질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외조부님은 예감이 있으셨는지 편지에서 항상 외조모님의 건강을 물어 왔었다. 편지에서 외조부님은 일찍 감옥에서 나와서 외조모님과 함께 있으면서 병중에 있는 그녀를 섬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큰 이모할머니와 손녀들이 함께 1972년 안훼이로 외조부님을 만나러 갈 때 심장병이 극히 악화된 것을 알았는데, 외조모님의 별세는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왜냐하면 그 때 외조부님과의 왕래가 유일하게 끊어지지 않은 사람은 바로 외조모님이었기 때문이었다.

사후에 같은 방에 있던 한 난우의 말에 의하면 외조부님은 벌써부터 형기를 마치고 출감하여 외조모님과 함께 있을 갈망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외조모님의 건강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편지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내 형기는 내 아내의 생명과 경기를 하는 듯하다. 만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출감할 수 있다면 내가 그를 잘 섬기겠노라. 이는 그가 나로 인하여 너무 많은 고통을 당했기 때문이다.”

외조부님은 투옥되기 전 교회 봉사를 위하여 전국각지로 바삐 다녔었다. 투옥된 후 순식간에 이십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다. 그 기간 동안 그들 부부가 함께 있었던 날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외조부님이 붙잡힌 후 그들은 사람들이 듣기를 좋아하는 많은 죄명들을 조작하여 무고히 음해하였다. 당시 많은 형제자매들이 그들에게 속았다. 그러나 외조모님은 그를 제일 잘 알았기 때문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에 관해 그들이 말한 일들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주님을 위하여 사람으로서는 받을 수 없는 치욕을 수없이 당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죽노라

제람교 감옥에 갇혔을 때 외조모님은 매월 한 번씩 소량의 음식과 일용품을 외조부님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청동 농장으로 이감된 후 외조모님이 그를 한 번 만나 보았지만, 그 후로는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다.

외조모님의 별세로 인하여 외조부님은 매우 괴로워했다. 같은 감옥에 있던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는 수일 동안 애통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큰 이모할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외조부님은 “나의 기쁨을 여전히 지켰노라”고 말했다. 수년간의 압박과 핍박도 그를 낙심케 하지 못했다. 이는 그가 앙망하는 분은 영원히 낙심케 하지 아니하시는 우리 하나님이었기 때문이다.

1972년 6월 우리는 농장으로부터 외조부님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큰 이모할머니와 농장으로 달려갔을 때 외조부님은 이미 화장되었고 유해밖에 볼 수 없었다. 한 난우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시 그의 심장병은 매우 심하게 발작하여 위독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사십 리 밖에 있는 농장병원으로 그를 경운기에 실어서 농군들이 쓰는 모자 하나를 씌우고 끌고 갔다. 그것은 건강한 사람조차도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진동을 가장 피해야 할 심장병환자를 그렇게 데려갔다. 바로 이렇게 외조부님은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별세하시게 되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의 베개 밑에는 아주 떨리는 손으로 쓴 몇 줄의 글을 담은 쪽지가 있었다. 그 말씀은 이러하다.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한 이것은 우주 가운데 최대의 사실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죽노라.”

농장 간부가 이 쪽지를 우리에게 보여줄 때 나는 주님이 이 말씀을 내 마음에 기억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노계 농장간부는 그가 많은 노트에다 소위 ‘반공일기’를 썼다고 했다. 이것은 옥중에서 진리에 대해 그가 새롭게 얻은 빛이었다. 하나님이 특별히 그것들을 보존하시지 않고는 그 중요한 원고들은 옥중에서 나올 길이 없을 것 같다.

옥중에서 들은 소식에 의하면, 외조부님이 아직 세상에 있을 때 끊임없이 한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였는데, 별세한 지 얼마 안 되어 그가 구원을 받고 주님께로 돌아왔다고 말해주었다. 외조부님은 돌아가셨다. 그러나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여 피에 젖은 면류관을 가지고 주님께로 갔다. 하나님은 그의 마지막 소원인 살아서 아내와 함께 있는 소원은 이루어 주시지 않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히11:13),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였느니라”(히11:16).

지금 그들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으나 그들의 기도와 열매는 계속 끊임없이 하나님께 열납 되고 있고 끝이 없는 효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그들의 발자취는 더욱 우리로 하여금 충성스럽게 주님을 향하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