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영혼이 아름다운 이유

초등학교 때부터 주일학교에 나오던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가정환경으로 인한 방황으로 소년원에까지 갔다 오게 되었다. 갈 곳이 없다며 교회에 와서 잠을 청했지만, 선뜻 열쇠를 내어주지를 못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담배꽁초를 여기저기 버리고, 무엇 하나 정리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사랑의 마음보다는 훈계의 말이 앞섰다.

마더테레사는 말했다. “이런 이들을 너무 나무라지는 맙시다. 아무리 설교를 한다고 해도 금방 이루어질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빗자루를 들고 누군가의 집을 깨끗하게 청소해주십시오. 그러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니까요.”

‘가장 미소(微小)한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한 그녀는 “저는 가난한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달까지라도 찾아갈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체를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의복을 입혀주고, 삶의 터전을 제공하는 것은 굶주리고 벌거벗고 집 없는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것입니다”라고 하시면서 아무런 조건 없이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셨다.

또한 그녀는 우리에게 무관심이 얼마나 무서운지 상기시켜 주셨다. “현대인에게 가장 큰 적은 한센병도 결핵도 아닙니다. 자신이 있건 없건 아무도 개의치 않고 모두로부터 자신이 버림받고 있다고 체념하는 것입니다. 최대의 악은 사랑이 모자라는 것, 하나님이 베푸는 사랑이 부족한 것, 바로 곁에 사는 이웃사람이 착취와 권력의 부패와 가난함과 병으로 고통을 당하여도 무관심한 것입니다.”

풍요로움 속에 살아가는 요즘의 아이들을 보면 불편함 없이 살아가는 것 같지만, 마음의 굶주림을 가진 아이들이 많다. 아무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고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마음의 가난함, 그것은 한 조각 빵에 굶주리는 것보다 훨씬 가슴 아픈 일이다. 누구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체념하는 이웃들이, 대화의 단절로 무관심과 외로움에 떨고 있는 아이들이 우리 곁에 있다. 겨울바람보다 더 차가운 가슴을 끌어안고 따뜻한 품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다. 날카로운 가시에 찔리는 아픔이 있을지라도 가난한 이들의, 작은이들의 희망의 쉼터가 되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아프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사랑과 연민입니다. 가난한 사람, 몸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희망을 품고 여러분에게 옵니다. 그들이 부드러운 사랑과 연민을 느낄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비록 여러분이 눈먼 사람을 위해서 편지를 한 통 써준다든지 우편물을 부쳐준다든지 누군가를 방문한다든지 아니면 누구에게 꽃이나 아주 하찮은 물건들을 갖다 준다든지, 아니면 누구를 위해서 빨래를 해준다든지 혹은 집 청소를 해준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크게 보십니다. 대단히 작은 일, 그것이 여러분과 내가 머물러야 할 자리입니다.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작은 일을 하려는 사람은 너무나 적기 때문입니다.”

테레사는 가장 작은 실천이야말로 가장 큰 사랑이라는 것을 가르치셨다. 구체적 실천이 없는 사랑은 관념에 불과한 것이다.

어느 날 저녁, 8자녀를 둔 한 힌두교인 가정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주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테레사는 한 끼 식사로 충분한 쌀을 가지고 그 집으로 갔다. 그들은 몹시 허기져 보였고 아이들의 눈은 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말할 수 없이 비참한 모습이었다. 쌀을 건네자 아이들의 어머니는 그것을 반으로 나누어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에 그 어머니에게 어디에 갔었냐고 묻자 그녀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들 역시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들’이란 식구 수가 같은 옆집의 이슬람 교인이었다. 그 어머니는 굶주림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의 쌀을 나눌 수 있는 용기와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도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 얼마 되지 않지만,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테레사는 그 어머니의 행복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날 저녁에는 쌀을 더 가지고 가지 않았다. 대신 다음날 조금 더 가지고 갔다.

가난은 아름답다. 그것이 외적이든 내적이든지간에. 적게 가질수록 더 많이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을 통하여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은혜의 통로가 열리기 때문이다(마5:3).

장봉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