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인생

 

지난 2월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공항으로 갔다. 한 시간 동안 운전하여 공항에 도착한 후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눈이 침침하며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럼증을 느꼈다.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쓰러지게 된다면 비행기 스케줄이 엉망이 될 것이라는 생각, 한국으로 제시간에 못 가면 한국의 일정이 엉망이 될 것이라는 생각, 병원으로 실려 가게 되면 그 비싼 미국 병원비를 어떻게 감당 할 것인가 하는 생각 등등 그 순간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시편의 말씀이 떠올랐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시102:24).

다행히 겨우 정신을 차려 하나님께 기도하고, 비행기를 타고는 무사히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또다시 운전 중에 비슷한 증세가 나타나 병원에 가게 되었다. 일주일동안 미국여정 중 시차로 잠도 부족하고, 일정에 쫓겨 힘이 들어 나타난 것으로 결론이 지어졌다. 얼마 후 회복이 되었지만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건강에 큰 염려 없이 살다가 건강, 죽음, 사명 같은 말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인생이 얼마나 연약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히로히토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범이며 한국의 기독교를 가장 많이 핍박한 박해자였다. 1938년 이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한국교회 성도들을 극한 고통 가운데 몰아넣었다. 2백여 교회가 폐쇄되었고 2천여 성도가 구속되었다. 특히 평양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교했다. 이런 악행을 저지른 히로히토는 일본인들에게 신적 존재였다. 그런데 영원불멸의 신이라던 그가 전쟁에서 패배하고 항복문서에 조인하기 위해 맥아더 장군과 마주 앉게 되었다. 맥아더 장군이 물었다.

“귀하는 가미사마(神)라고 했는데 인간인 나와 어떻게 조약할 수 있겠소?” 그러자 히로히토는 “나는 코로 숨 쉬는 인간일 뿐 가미사마는 아닙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신이라고 자처하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섬기도록 종용했던 그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모세는 시편에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9-12)라고 하였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는 의미가 무엇인가?

어느 분은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일곱 가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첫째, 인생은 심히 짧고 허무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둘째, 인생은 끝이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깨닫게 된다. 셋째, 지나간 세월동안 한 일이 없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넷째, 남은 인생을 지혜롭게 계획하여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깨달음을 갖게 된다. 다섯째, 죽음을 준비해야겠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여섯째, 하나님 앞에서 더욱 바르게 살아야겠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일곱째, 오직 우리 하나님 밖에는 의지할 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마지막 최후의 순간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다 하나님께로 가야겠다는 깨달음을 얻게 한다.

이러한 깨달음에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본 시편의 기자 모세가 말하는 날 계수함은 단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잘 활용하겠다는 뜻만이 아니다. 그 앞 절에서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라는 말을 생각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주의 노의 능력과 원인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그 앞에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갔다고 한다. 즉 주의 뜻도 모르고 인생을 허비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가르쳐 달라고 했으니 바로 그 몰랐던 것을 아는 것이 찾고 있는 지혜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생들이 주의 분노 가운데 일생을 순식간에 마치는데, 주의 분노의 능력과 이유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잘 안다면 우리 인생이 주의 분노 중에 일순간에 지나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잘못된 것을 회개하고 바른길로 가는 것이 짧은 생을 사는 인생의 지혜라는 것이다.

어느 욕심 많은 농부가 있었다. 이 농부는 자기 집 옆에 아주 기름진 밭이 하나 있어서 그 밭을 탐내었다. 밭도 기름지고 또 자기 집과 가까우니까 저 밭을 내가 어떻게 하든지 가져야지 생각하고 사려고 하는데 주인이 팔려고 하지 않는다. 몇 번씩 팔라고 해도 팔지 않는다. 어떤 날도 주인에게 찾아가서 그 밭을 팔라고 사정을 했는데 한 마디로 거절당했다. 그래서 이 농부가 그 주인에게 말했다. “좋소! 안 팔아도 좋소! 그러나 나는 기어코 이 밭을 살 것이오. 당신이 죽고 나면 당신 아들한테라도 꼭 사고 말거요!”

그런데 이 말을 할 때 이 사람의 나이는 70살이고 그 밭주인의 나이는 60살이었다. 웃기는 이야기가 아닌가? 자기는 70살인데, 지금 60살 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죽고 나면 그 아들한테서 밭을 사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것이 인생이다. 다른 사람 죽는 것은 알면서 자기 죽는 것은 다들 모른다. 내게도 끝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시간은 이미 시위를 떠났고 지금 이 시간도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끝이 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잊지 않는 것이 지혜다.

이안드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