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유명한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 정말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의 눈으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 사건이 바로 그렇습니다. 죽음과 절망의 십자나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매달림으로 그 나무는 생명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생명나무는 죄 지은 후에 누구도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온갖 유혹과 멸시와 천대를 이겨내고 죽음의 나무에 오르십니다. 주님이 나무에 오르시자 죽은 나무에 싹이 돋아 생명의 나무가 됩니다. 주님의 몸을 열매로 내어놓고 주님의 피를 과즙으로 내어놓아 영원히 푸른 생명나무가 되어 온 인류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실 때 손과 발과 옆구리에 새겨진 상처의 흔적들은 동일하게 하나님 아버지와 어머니 마리아의 가슴에 새겨집니다.

2004년 제작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면 어머니 마리아의 절제된 고통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고통스런 긴 시간 동안 어머니 마리아는 울음을 참느라 양손에 흙모래를 꽉 움켜쥡니다. 얼마나 꽉 움켜졌는지 손톱 밑은 피로 얼룩이 졌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하늘에서 땅으로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집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흘리신 한 방울의 눈물이 지축을 흔들며 사단과 죄와 사망을 영원히 삼켜버립니다.

분주히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 저마다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다음 글은 기동대에 근무 중인 한 분의 경장이 현장에서 겪은 일입니다.

『한 남자가 지하철역 계단에 앉아 있어 통행이 불편하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평소 취객이나 노숙자로 인한 신고를 많이 접한 터라 그날도 대수롭지 않게 현장에 출동했다. 퇴근시간이라 지하철역 출구는 사람들로 붐볐다. 계단 한 가운데에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쳐다봤다. “선생님, 일어나 보세요. 계단 한가운데 앉아 계시면 다른 사람이 지나가기 불편해요.” 청년은 대답 없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 양손을 만지작거렸다. “여기 앉아 계시면 안 돼요.”

다시 말을 걸었지만 청년은 씩 웃기만 했다. 알고 보니 지적 장애를 가진 청년이고, 길을 잃은 듯했다. 보호자 연락처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주머니를 뒤져 보았지만 지갑도 휴대 전화도 없었다. “팔목 한번 살펴봐. 혹시 미아 팔찌 했을지도 몰라.” 함께 출동한 조장님의 말을 듣고 청년의 옷소매를 걷어 보았다. “어? 이게 뭐지?” 청년의 팔에 미아 팔찌 대신 여러 개의 숫자가 크게 적혀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번호로 전화하자 다행히 보호자와 연락이 닿았다. 보호자가 오길 기다리며 다시 청년의 팔을 살펴보았다. 전화번호를 여러 번 썼다 지웠는지 양팔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차라리 명찰을 달아주지 왜 팔에….’ 독한 유성 매직으로 물든 청년의 팔이 안쓰러웠다.

“아이고, OO야! 괜찮니?” 곧 청년의 어머니가 찾아오셨다. 머리에 서리가 하얗게 내린 그분은 감사하다며, 몇 번이고 굽은 허리를 더 굽혀 인사하셨다.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장사하느라 잠깐 한눈판 사이 가끔 이렇게 길을 잃어버려요. 얘가 몸에 있는 물건들을 죄다 버려서 팔뚝에 연락처를 적을 수밖에 없네요.” 눈물을 훔치시는 어머니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글을 읽으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아들의 팔에 매직으로 전화번호를 적으며 흘렸을 어머니의 뜨거운 눈물이 마음을 타고 흐르는 듯했습니다. 아들의 팔에 전화번호를 새기는 어머니는 날마다 당신의 가슴에 상처를 새겼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닌 상처들은 예수님의 상처와 닿을 때 비로소 낫게 됩니다. 생명을 내놓아 불어넣으신 그 사랑의 흔적이 이제 우리의 흔적이 되어 다른 이의 상처에 예수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는 것이 그분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사명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백합니다. “내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노라.” 내 삶의 모든 고통과 아픔이 예수님의 흔적을 새기기 위한 사랑의 순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며 거룩한 증표인 예수님의 흔적이 더 뚜렷이 새겨지길 기도해 봅니다.

박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