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성자

 

지난 2월 13일 오전 서울 중학동 주한 일본 대사관 건너 ‘평화의 소녀상’ 앞에 81세의 노신사 노무라 모토유키라는 일본인이 찾아왔다. 그는 위안부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소녀상 앞에서 간절한 기도를 드린 뒤 플루트를 잡고 가곡 ‘봉선화’를 연주했다. 감격에 겨운 나머지 눈물이 쏟아져 중간에 연주가 끊기기도 했다. 눈물을 닦은 그는 장미꽃 한 송이를 바친 뒤 다시 ‘진혼곡’을 연주했다.

“나는 5살 때부터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조센징이라 부르며 차별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지금 나의 행동이 일본에서는 매국노로 몰린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일본은 하나님의 정의에 반한 종군위안부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 깊이 회개해야 옳다. 일본 침략의 역사가 없었다면 ‘봉선화’라는 노래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일찍이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투신한 목회자다. 1968년 살던 집을 팔아 서울에 온 뒤 청계천 판자촌 일대에서 빈민 구제활동에 나섰다. 국경을 넘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그를 두고 사람들은 ‘청계천의 성자’라고 불렀다.

당시 군부정권 주도하의 경제개발이 추진되면서 서울의 빈민들이 청계천에 몰리기 시작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빈민들의 청계천은 열악한 환경과 굶주림과 질병에 처참한 지경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지극히 작은 자들’과 함께 아파하면서 주님의 눈물을 나누고자 했다.

김종길(청계천 활빈교회의 당시 집사) 장로는 노무라 목사님 이야기를 듣자 이렇게 회상했다. “어이구 우리 목사님요. 우린 큰형님이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뵙기와 달리 농담을 아주 잘 하셨어요. 당시 일본인이 한국을 돕는 걸 이상하게 여긴 당국이 미 CIA요원 아니냐며 비자를 일주일밖에 주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도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나갔다 가 또 다시 들어오면 되지’ 하시는 겁니다.”

“청계천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도쿄의 집을 팔고 오셨다가 나중에는 산골에 들어가 목회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분은 자기를 희생하는 촛불의 삶이었습니다.”

일본에 이런 ‘살아 있는 양심’이, 그리고 진실을 말하고 행동하는 용기를 지닌 그리스도인이 있다니 감격할 따름이다. 그를 볼 때 십자가을 지고 ‘비아돌로 로사’를 걸어가셨던 주님의 뒷모습이 연상된다. 아무리 마음에 감동이 되더라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남다른 용기가 필요하다. 신앙생활에는 자신의 잘못을 진실 되게 뉘우치는 참회와 함께 선을 행하고자 하는 용기가 수반되어야만 주님을 따를 수가 있다.

“아무든지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십자가의 사랑을 용감히 실천한 또 한 사람이 있었다.

한국 고아의 아버지

그는 소다 가이치다. 그는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는 유일한 일본인이며, 또한 한국정부로부터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받은 일본인이기도 하다. 그가 이렇게 한국인들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데에는 그가 부인과 함께 한국 고아들을 위해서 그들의 삶을 바쳤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젊은 시절은 홍콩에서 대만을 거치는 방황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대만에서 손문의 혁명운동에도 가담하여 여러 번 죽을 고비도 넘겼다. 이렇게 방황하던 소다가 어느 날 술에 만취된 채 노상에서 쓰러져 거의 죽게 되었을 때, 무명의 한 한국인이 지나가다 그를 업고 여관으로 데려가서 치료해주고 밥값도 내주었다.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이 사람 덕분에 목숨을 구한 것이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05년, 소다는 은인의 나라인 한국에 은혜를 갚으리라 결심하고 서울 YMCA 일본어 선생으로 취직하였다. 소다는 이 무렵, 수감 중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가 풀려 나온 이상재 선생에게 큰 감화를 받아 기독교인이 된다. 또한 그는 41세 때 독실한 신앙인인 30세의 우에노 다키와 결혼하게 된다.

소다는 105인 사건(1911년)으로 YMCA 동료들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자, 일제의 만행을 공격하면서 동료들의 석방을 위해서 백방으로 힘썼다. 이 때 한국인들로부터 감사와 찬사도 들었지만 간사한 일제의 간첩이라는 비방도 감수해야만 했다.

1921년부터 45년까지 소다 부부는 천명 이상의 고아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보았다. 이 사역을 하면서 이들이 겪은 고생과 역경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버려진 아기를 업고 유모를 찾다가 구박을 당하기 일쑤였고, 소다의 고아원에서 자란 청년이 항일운동을 하다가 헌병대에 체포되어 취조를 당하는가 하면, 위선자라고 비방 받는 일도 무수했다.

소다는 일제의 패망 후 홀로 일본으로 돌아가서 한 손에 세계평화라는 표어를, 또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다니면서 조국 일본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외쳤다.

안타깝게도 한국에 남아서 고아사업을 계속하던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한국사랑은 계속되었으니, 1961년 당시 한경직 목사님의 초청으로 94세였던 소다는 다시 돌아와, 영락보린원에서 1년 동안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주님 품으로 떠났다.


지금은 땀과 눈물과 피로 얼룩진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해야 하는 때이다. 주님은 누구를 위해 그 십자가를 지셨던가? 자신의 잘못은 쉽게 인정하지 못하면서 상대방은 가차 없이 비난하는 우리, 더구나 서로 으르렁거리는 대상을 사랑하기에는 더욱 어려운 우리네 자화상이다.

그러나 소다와 노무라 두 분이 지고 간 십자가, 그 십자가에서 한국과 일본의 불신과 미움이 녹아내리는 것을 본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의 가정, 교회, 신앙공동체들 나아가 한국교계에 만연된 불화와 반목이 정화되기를.

“주여, 내 가족과 교인들과 동역자들의 작은 허물조차도 용납하지 못하는 이 내 비좁은 가슴이 녹아내리는 사순절이 되게 하소서!” 

 이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