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우리 집은 6층인데 앞이 탁 트여 있어 조경된 공원이 잘 보입니다. 덕분에 베란다 창문에서 사계절의 정취를 한껏 즐길 수 있는 특혜를 누리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잘생긴 거목들이 겨울 잎을 완전히 떨구고 늠름한 진면목을 드러냈을 때도 좋았지만, 함박눈과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 풍경은 탄성이 저절로 나오면서 혼자 보기에는 미안하고 아깝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쌓인 눈 속엔 움트는 새싹의 자양분이 될 가랑잎들이 숨어 있을 터입니다. 새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푸르던 잎사귀들이 가랑잎의 신세가 되어 썩어져야 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입니다.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듯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썩어집니다. 스승은 제자를 위해 썩어집니다. 다른 이를 위한 양분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앞에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습니다. 자양분의 최상의 표본은 이천년 전 우리를 위해 친히 썩어주신 예수님이 아닐까요. 인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한 알의 밀알로 썩어지는 참 제자들로 인해 그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작년 한국인이 뽑은 감동 대상에 고 이태석 신부님이 수상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인간에게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떠났습니다. 가장 가난한 곳에서 의술을 펼치고 싶다는 어린 시절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의사로서의 평탄한 삶을 포기하고, 사제가 되어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척박한 땅인 수단의 톤즈로 향했습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처럼 ‘가난한 이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마25:40)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말입니다. 내전과 전염병으로 병든 톤즈에 병원과 학교를 짓기 시작합니다. 종일 밀려드는 환자를 쉬지도 않고 치료하고, 며칠 밤을 새며 걸어온 환자에게 두 번 이상 병원 문을 두드리지 않게 잠을 줄여가면서 환자를 맞습니다. 또한 병원까지 오지 못하는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톤즈에서 유일하게 한 대 뿐인 앰뷸런스에 각종의 약과 고온에 약한 백신을 아이스박스에 넣어 접종을 해줍니다.

병원이 자리를 잡아가자 신부님은 소년병으로 끌려가는 아이들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황 속에서 할 일이 없는 아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학교를 만듭니다. 돈 보스코 학교는 12년 과정의 초. 중. 고등학교로 예수님의 사랑이 깃든 남부 수단의 가장 실력 있는 학교가 됩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꿈꾸고 사랑을 배워갑니다.

어린 시절 몰로카이 섬에서 한센인들을 돌보다가 한센병에 걸려 하나님의 품에 안긴 “다미안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보고 그와 같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 한 후, 톤즈에 와서 그 다짐을 잊지 않고 한센인 마을을 찾아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과 몸을 어루만져줍니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고 직접 고름을 짜내고 붕대를 감아주며 발에 깊은 상처를 입은 환자들을 위해 직접 주문해 만든 신발을 신겨줍니다.

신부님은 선종 8개월 전에 수단에서의 삶을 그린 『친구가 되어주실래요?』의 책에서 한센인들의 삶속에 살아 움직이고 계시는 예수님의 신비스러운 힘에 대한 느낌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로 하여금 소중한 많은 것들을 뒤로 한 채 이곳 수단까지 오게 한 것도, 열악한 환경이지만 후회 없이 기쁘게 살 수 있는 것도, 모두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 주위로 모이게 하고 주님의 존재를 체험하게 만드는 보잘것없는 나환자들의 신비스러운 힘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하게 된다. 이러한 나환자들의 특별한 능력을 보면서 식물인간, 뇌성마비, 뇌졸중, 자폐증 등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환자 가족들과 함께하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가끔 묵상을 하게 된다.

환자들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아픔을 가슴에 품고 평생 그들을 보살펴야 하는 가족들의 고통은 당해 보지 않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보다 더 큰 멍에나 십자가가 이 세상에 또 있으랴.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들이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 미치는 힘은 때로는 상상을 초월한다. 가족을 하나 되게 하고 가족들에게 참된 신앙을 갖게 하며 가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깊게 체험하게 하는 그들의 힘은 신비스럽기 이를 데 없다.

물론 시간도 많이 걸리고 엄청나게 큰 고통의 문을 통과해야 하겠지만, 우리에게 뜻밖의 큰 은총의 선물을 주는 그들에게 우리가 오히려 감사해야 하고 그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께도 감사드려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에게 오신 작은 예수님일 수도 있고, 마지막 심판 때 우리가 주님 오른편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미리 파견된 천사일 수도 있으며, 우리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 줄 천국의 열쇠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으며 저만 애쓰고 희생한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큰 교만인지 깨닫습니다. 제게 없는 사랑을 심어주기 위해 수고하는 가족들, 지인들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천사들 일터이니 정말 머리 숙여 감사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썩고 썩어지는 가랑잎의 신세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큰 복임을 깨닫게 하신 주님 찬양 받으소서.

박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