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가치관, 인생관, 성향과 취향이 다르기에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천차만별이다. 누군가에게 환영받는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상종하기도 싫은 사람일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랑하며 따라야 할 예수님도 누군가에게는 싫은 대상이요 배척해야 할 존재이시기도 했다.
가진 것 없고 멸시와 천대를 당하던 목동들에게 메시아 탄생의 소식은 더없이 기쁘고 복된 소식이었다. 반면 헤롯을 비롯한 신하들에게 없애야 할 대적이었다. 누리고 있는 부와 권력을 송두리째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의 특징은 대체로 가진 것 없는 사회적 약자, 멸시와 천대를 받던 이들이었다. 열두 제자 중 과반이 갈릴리 어부들이고 세인에 손가락질 받던 세리 마태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시면 한자리 얻으려는 의도로 따르는 이들도 있었다. 가룟 유다가 대표적인 인물이고, 야고보와 요한을 비롯해 다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서 뭔가를 얻기 바라는 기대치가 있었다.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점으로 인간적인 욕망이나 욕심을 내려놓은 사람들과 내려놓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어 영원이 가름됐을 뿐이다.
대체로 현실 세계에서 아픔이나 아쉬움, 부족함이 많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좋아했다.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 따르면 뭔가 위로를 받을 수 있고 배울 수 있고, 잠시나마 시름과 근심을 내려놓을 수 있는 인생 문제의 해결사 같은 존재가 주님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천상의 메시지는 잘 먹혀들었다. 물론 대부분 잘 못 알아들었지만 동기 부여와 자극은 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이미 가지고 있는 자들,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대접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거슬리고 불편한 존재였다. 모세오경의 가르침에 반하는 듯한 주장을 하고, 장로의 유전으로 내려오는 가르침을 거부하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바리새 선생들에게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 소경이라 모욕을 주고,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로마 속국의 치욕을 버티고 있는데, 그 상징성의 본체인 성전을 허물어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말도 안 되는 허풍이나 떠는 존재가 그들이 보는 나사렛 청년 예수의 실체였다.
예수님을 따르면 잃을 것이 많은 사람, 기존에 가지고 있던 틀을 깨뜨리는 것이 두려운 사람, 스스로 만족하고 더 위대한 삶에 대한 필요와 신령한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장애물이요 제거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이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말씀이라는 기치를 들고 잘못되고 어그러진 것들, 타협하고 변형된 것들, 영적이고 신령한 것에 육적이고 인간적인 것을 섞어버린 것을 과감히 도려내고 뜯어고치고 바꾸어서 본질이신 하나님, 원형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 예수님 당시 기득권을 손에 쥐고 안주하기를 원했던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그분의 놀라운 하나님 나라 선포에 대해 관심도 없고, 그것이 오히려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독설로만 들렸다.
무엇이 순수했던 사람을 변질되게 만드는가. 무엇이 대쪽같던 사람을 적당히 타협하게 만드는가. 대부분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 시발점이다. 주님을 만난 체험으로 그 주님만을 위해 남은 생을 불사르겠다 다짐했던 순수한 마음을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변하면서 다 잊고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환경이 그렇게 만들고, 주변 사람들이 요구하기에, 나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노라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을 뿐.
계시록 2장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처럼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예수님이 아시고,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않고,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의 거짓된 것을 드러냈으며, 참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훌륭한 교인이었을지는 몰라도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타성에 젖어 자기를 위해 열심히 살아온 일 중독자인 것이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모든 일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시작한 일들이 어느새 목적이 되고, 나의 경력이 되고, 내 욕구를 성취하는 도구로 전락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 결국은 바리새인들처럼 되는 것이다. 말씀도 연구하고 가르치고 모든 일에 모범적인 삶을 살았지만, 껍데기만 남아 건질 게 없어 예수님께 크게 책망받는 망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을 싫어하는 사람들처럼 겉모습은 예수님의 제자요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지만, 내용은 이미 변질되고 상해버려 건질 게 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예수님을 싫어하던 자들과 동일한 결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처음의 순수성을 회복해야 한다. 목동들이 동방박사들과는 달리 아기 예수께 아무것도 바치지 못했지만, 메시아 탄생을 순수하게 기뻐하며 경배하는 그 진심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셨다. 배우지 못했고 세상의 멸시와 천대 속에 상한 심령이지만, 가진 것이 없고 잃을 것이 없기에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천상의 말씀들에 집중할 수 있었던 무리처럼, 주님과 관계를 맺은 그 처음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직분이라면 그것조차 내어버리고, 가족이라면 가족조차 버리고, 내 자존심이라면 그것도 쓰레기로 버리고….
이것의 본을 보여준 이가 사도 바울이다.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4-9)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초심으로 돌아가자.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끊을 것은 끊고 다시 첫사랑에 풍덩 빠지는 가을을 준비하자.
기영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