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없는 영성훈련

 
후반기부터 신학교에서 영성훈련 강의를 하고 있다. 물수도사가 영성훈련을 가르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함께 참여하는 신학생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훈련이라면 어릴 때부터 지독히 싫어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훈련을 열심히 하라고 하고 있다. 
나의 훈련은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불호령과 함께 막대기로 시작되었고, 수도사가 되어서는 영적 아버지인 스승님께 영성훈련을 받았다. 선생님은 말뿐인 아닌 삶의 모범을 보이시며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셨다. 쉽게 흉내 내기 어려운 영성의 훈련은 늘 모범이셨고, 많은 이들의 영적 스승이셨으며 하늘나라의 큰 기둥같은 일꾼이셨다. ‘영성훈련이 약해지면 김빠진 사이다.’와 같다고 하시면서 늘 영성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흔히 “나약한 인간이 실수하고 범죄 하기 마련이지. 어떻게 하나님의 율법을 그대로 지킬 수 있냐? 그것은 이 땅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도바울이나 프랜시스나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들은 우리와는 처음부터 다르다.”고 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복음은 완전한 복음이다. 말씀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가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는다고 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심은 분명히 지키라고 주신 것이기에 지킬 수 있는 능력까지 주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지금 예수님을 따르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만약 사도들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르고자 처음부터 굳은 결단을 하고, 진정 기쁜 마음으로 따른다면 훨씬 더 영적으로 높은 경지로 비상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생애 전체를 따라 주님처럼 살겠다는 결단이 있다면 훈련은 시작된 것이다.
이에 성경 속 믿음의 선진들은 수없이 결단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피 흘리기까지 영성훈련을 거듭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을 성공적으로 인도하는 방법으로 영성훈련의 중요성을 말한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7-8). 연습이란 단어의 원어는 ‘굼나제’이며 여기서 파생된 단어가 체육관을 뜻하는 ‘짐네지움’이다. 굼나제는 운동선수들이 체육관에서 경기를 위해 피눈물 나게 연습하는 것을 가리킨다.
불굴의 의지 박지성 선수는 평발을 이겨낸 축구 선수로 유명하다. 흔히 말하길 평발은 잘 뛰지 못하는 건 물론 걸을 때도 이상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신체적인 악조건을 갖고도 오히려 악조건을 더 강한 좋은 조건으로 바꾸어 버리며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했다. 그는 선수시절 항상 뛰고 연습을 했기 때문에 발에 상처가 가실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그를 “산소탱크”라고 불렀다. 두개의 심장을 지닌 사나이처럼 지칠 줄 모르고 경기장을 뛰어다녔다.
어떤 해설자는 박지성의 발바닥에 하얀 페인트를 칠한다면 운동장 전체가 하얀 페인트가 묻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는 쓰러질지언정 무릎 꿇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를 ‘산소탱크’라고 부르지만 고백하건데 나 역시 뛰는 것을 그다지 즐거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축구는 많이 뛰어야 잘 할 수 있는 경기다. 축구를 하기로 결정했다면 뛰어야 한다. 많이 뛰는 선수는 그만큼 인정받을 것이고 최고가 되고 싶다면 가장 많이 뛰는 선수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위대한 선수들은 기초를 단단히 다졌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훈련을 반복했다. 식단과 체중 조절, 모든 일에 절제하며 몸 관리 등 피나는 훈련들이 그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실전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그에 따른 결과이다. 우리의 모범이신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30년의 준비기간이 있었고, 40일 단식을 하신 후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우리 모두도 예수님이 사셨던 방식대로 그 길을 부지런히 따라가야 한다. 모범적인 영성훈련의 길을 가셨던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지만 경건의 연습은 금생과 내세까지 이어진다. 하물며 썩을 면류관이 아닌 하늘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달려가는 우리가 어찌 훈련을 게을리 할 수 있으랴. 우리 역시 영적 체육관인 광야에서 훈련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나아가야 한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우리에게 더 열심을 내라고 응원하고 계시다. 훈련 없이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만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금방 자취를 감춘다. 겸손하고 충실하게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사람들이 영혼의 위대한 선수가 될 수 있다.
허드슨 테일러는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으로 성경을 읽었다. 육십팔 세 때에 다음과 같은 간증을 했다. “나는 사십 년 동안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사십 번을 읽었습니다. 매일 구약은 세 장, 신약은 한 장, 시편 일 편 정도를 읽었습니다. 느낌이 있을 때는 많이 읽고, 어떨 때는 묵상을 많이 하는 대신 조금 적게 읽었습니다. 매년 성경을 1번씩 읽었습니다. 나는 성경 읽는 것을 영성의 훈련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생활 가운데서 일하는 인도로 삼았습니다.”
그는 평생 일찍 일어나 아침을 부흥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어떤 환경에서도 결코 경건의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먼저 음악회를 열고 악기를 조율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매일 성경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조율하고, 그 후에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일을 해야 합니다.”
프랜시스 살레시오는 말한다. “비록 하나님이 순식간에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단번에 우리의 변화를 기대하고 능력을 발휘하려는 것은 우리의 헛된 욕심과 안일함이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우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 기나긴 광야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광야의 훈련을 통해 단련되어지고 마음과 행실이 점진적으로 변화되어 마침내 경건에 이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할 것은 훈련과정이 고되고 힘들다고 멈추어서도 안 되며, 넘어지고 실패해도 절망으로 인해 사단에게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훈련관이신 예수님께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받을수록 더 높이 성장할 수 있다.
주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최고의 영적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믿음의 트랙을 뛰고 또 뛰어야 한다. 또한 영성훈련을 매순간마다 최선을 다해 철저히 받아야 한다. 상처가 나고 찢기고 피를 흘려도 때로는 숨이 헉헉거려도 영성훈련을 멈추지 말자. 이 또한 주님께서 기뻐하실 영광의 흔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 예수님의 도우심과 은총을 끊임없이 힘입어야 한다. 주님과 함께 할 때 우리의 멍에는 가벼워진다. 성령의 은혜가 부어질 때 계명을 지켜나갈 수 있다. 그러기에 성령의 은혜를 매일매일 구하며 기도의 훈련을 쌓고, 매일매일 말씀을 가까이하며, 말씀의 인도함을 받으며 영성 훈련에 박차를 가해야만 한다. 힘에 겨워 지칠 때도 있겠지만 그때는 간절하게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보자.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성령께서는 연약한 우리의 간구를 멸시치 않으실 것이다.
내가 영성훈련을 하다가 연약한 모습으로 쓰러지거나 실패한 것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회개하고 결단하여 다시 일어서면 주님께 영광이 된다. 훈련하지 않는 게으름이 더 부끄러운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는 분이다. 그분을 사랑하면서 영성훈련에 성실하게 임해보자. 남들 보기에 흉내만 내는 그럴듯하고 외식적인 모습 말고, 부족하고 연약해도 진실하게 주님과 나만의 시간을 보내보자. 그 꾸준한 훈련이 우리를 주님나라로 인도해 줄 것이다.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