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469
이 땅에 꽉 차 있는 악의 세력을 무너뜨려 주소서
몇 차례 예배를 반복하는 동안 우리가 이런 때에 성찬식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단장 최홍준 목사님의 말씀에 모두 “좋습니다!”하며 마음이 일치했다.
성찬을 받으면서 나의 간절한 기도는 “주님! 주님의 이 피를 정말 이 땅에 뿌려 주소서! 아니 저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이 삼천리강산에 보혈의 강으로 흐르게 하소서! 북한의 우상 섬기는 죄와 남한에 타락한 죄, 흥청거리며 방만하게 날뛰는 음란과 방탕과 모든 위선과 부패와 온갖 죄악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보혈로 씻어 주소서.” 이것은 회개의 성찬이었다. 오랜만에 회개와 감격의 눈물이 쏟아졌다.
그 후에 단장 목사님은 “이제 이만열 교수님과 주선애 교수님께서 나오셔서 각각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하셨다. 나는 그 시간에 정말 말씀을 선포하고 싶어졌다. 나는 원래 내향성인데 말이다. 성령의 역사였다. 먼저 이만열 교수님은 교회사 교수님답게 말씀을 시작하셨다. “바로 이 평양성에서 우리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들으며 북한의 많은 순교자들을 생각나게 하셨다. 그다음 차례로 내가 말씀을 전해야 했다. 벅찬 가슴으로 앞에 나가 섰다. 많은 목사님, 장로님,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의 눈동자들이 나에게 쏠렸다.
“나는 바로 이곳 평양에서 나서 여기서 자랐고, 1948년에 핍박의 기운이 돌아 순교할 자신이 없어서 남한으로 도망갔었습니다. 50여년 만에 고향에 온 나는 마음이 착잡합니다. 곳곳마다 현수막은 ‘예수 부활하셨다’에 반하여 ‘수령님은 살아 계신다.’가 쓰여 있고, 집채 크기로 걸려 있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옛날 평양시는 오늘 같은 주일 아침이면 흰옷 입은 어른들이 우렁차게 언덕마다 울리는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구름떼 같이 올라가던 고장입니다. 오늘 평양 한복판에서 우렁차게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성읍을 회복하실 하나의 사인으로 믿어집니다. 남한으로 가기 전엔 고등부 학생들과 몰래 집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하면 창문에 이불을 걸고 가만히 소리를 죽여 가며 찬송을 부르곤 했는데 오늘 우리가 이렇게 우렁차게 부르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눈물이 납니다.
만일 우리가 오늘 이런 일이 없었다면 그저 봉수교회에 가서 예배 한 번 보고 왔다고 보고하게 될 것뿐인데 하나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모여 기도하게 하시는 것은 북한에 대해 무관심하고, 잘 먹고 잘 살면서 더 풍요만을 추구하던 우리 남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 회개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돌아갈까 봐 하나님께서 이런 특별한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전 7시부터 오후 2시까지 금식 기도 부흥회를 한 셈이다. 2시가 되어서 보위원은 이제 그만하고 봉수교회에 가라고 했다. 그때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점심을 늦게 먹고 봉수교회로 갔다. 그곳은 텅 비어 있었고 얼마 있다가 그 교회 목사라는 사람이 노동을 하다가 뛰어왔는지 앞에 서서 정치 선전 같은 말을 했다. 우리는 다시 우리 나름의 예배를 드리고 봉수교회를 떠났다. 교회 앞마당에는 평양신학교라고 쓰여 있는 집이 한 채가 있었다. 문은 굳게 닫쳐 있었다. 그 다음 칠골 교회를 다시 방문했다. 거기서도 목사라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하나도 없는 방만 텅 비어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이 고장 사람들이 멀찍이 서서 우리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접촉할 수 없게 한 모양이었다.
나는 한 가지 놀라운 일을 겪게 되었다. 만경대에 갔을 때 김일성이 자라났다고 하는 작은 옛날 농가로 들어갔다. 보이는 방안에 그의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강반석의 사진을 보는 순간 우리 육촌 주선길 오빠의 부인과 너무 닮은 것이 아닌가. 하지만 너무 뜻밖의 일이라서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며 가슴이 뛰었다. 생각해 보니 강반석은 우리 형님과 가까운 친척이 맞다. 강량욱 목사는 기독교연맹 위원장 또는 통일위원회 위원장 등을 한 것으로 안다. 어떻든 그 육촌 형님은 강량욱 목사를 친오빠라고 했는데, 지금 기억으로 강반석 하고는 아마도 친형제는 아니라도 4촌간이 되지 않는지 생각이 들었다.
만경대는 성역이라서 참배하러 줄을 서서 들어오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게 되어 있었다. 탈북자들을 통해 듣는 만경대 이야기는 이랬다. 김일성의 할아버지 김응우가 너무 가난해서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에 어떤 지주의 묘직이로 정착하여 살았다. 바로 이곳에서 김일성이 태어나 이를 기념하고자 만든 곳이 '만경대 고향집'이다.
그런데 나의 정의여학교 동창 김귀혁 권사(영락교회)의 어머니는 그 지주 딸로 그녀의 외가이다. 김권사는 총명하고 열정적 신앙을 가진 친구로 자기 남편이 치과의사를 하면서 소실을 얻고 사는 동안 뜨개질을 해서 자녀들을 키웠다. 그 고독하고 슬픈 세월을 성경 말씀을 외우면서 자녀 6남매를 다 교육시켰다. 지금 90세라 기억이 좀 감퇴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성경 100장을 끄떡없이 외우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설교를 하러 나가면 따라와서 그 성경을 외워주기도 했다.
고려 호텔에서 하루 밤을 더 지내고 그 다음 날은 평양 시내 관광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기대하며 밤을 지냈다. 옛날 흔적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관광안내자가 빵공장을 가야 하는데 빵기계가 고장이 나서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고아들에게 빵을 만들어주도록 한민족복지재단을 통해 여기 방문하러 온 교회 목사님들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에 빵 기계를 보여줄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빵 기계가 언제부터 고장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빵공장에는 가지 않았다. 오후에 빵을 만들어 우리들에게 가져왔는데 우리나라 제과점 빵과 같은 빵이다. 굶주린 아이들이나 먹일 것이지 왜 여기서 이 빵을 우리가 먹어야 하나 싶었다.
그 다음에 소년 궁전이라는 곳에 갔다. 굉장하게 만들어 놓고 예쁘고 똑똑한 아이들을 데려가 한 가지씩 전문적으로 재능을 훈련시키는 곳이었다. 아이들이 노래하며 율동하는 교실, 컴퓨터 몇 대 놓고 훈련하는 교실, 습자교실 등이 있었다. 이 시대에 습자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리고 연극장에서 발표하는 것 등을 관람하였다. 늘 호기심을 갖게 하던 옥류관! 그곳은 아름다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대동강 역시 내가 즐기며 건너다니던 모습이 아니었다. 건너편에 우뚝 서 있는 주체탑 그리고 모래사장이 일체 없어지고 강가로 둑을 만들어 옥류관은 배를 탄 것처럼 강위에 지어졌다. 왼쪽으로 보이는 모란봉은 옛날처럼 우뚝이 서 있지 않고 아파트에 감추어져 봉우리만 보였지만 나의 그리운 곳이었다.
내가 선교리에서 여학교를 시내로 매일 같이 건너다니던 대동강 다리였다. 그 다리는 여전하고 왼편으로 보이는 능라도도 반갑게 다가왔다. 나의 백부 주요남 장로님의 배려로 한두 번 요리 배를 타고 뱃놀이를 하던 일이 생각났다. 교회 어른들과 함께 즐기던 일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오른편에 보이는 양각도 섬은 교회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나무 그늘에서 죽을 쑤어 먹던 곳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주체탑이 또 서 있었다. 그리고 푸에블로 선 관람은 들어가기도 싫어 거절하고 밖에 서 있었다. 토마스 목사 순교 탑을 그들은 영미를 파멸시킨 자랑스러운 고장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반기독교적이었다. ‘하나님! 이 땅에 꽉 차 있는 악의 세력 무너뜨려 주소서!’ 속으로 기도하며 슬픈 마음으로 변해버린 평양시를 관광했다.
몇 차례 예배를 반복하는 동안 우리가 이런 때에 성찬식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단장 최홍준 목사님의 말씀에 모두 “좋습니다!”하며 마음이 일치했다.
성찬을 받으면서 나의 간절한 기도는 “주님! 주님의 이 피를 정말 이 땅에 뿌려 주소서! 아니 저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이 삼천리강산에 보혈의 강으로 흐르게 하소서! 북한의 우상 섬기는 죄와 남한에 타락한 죄, 흥청거리며 방만하게 날뛰는 음란과 방탕과 모든 위선과 부패와 온갖 죄악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보혈로 씻어 주소서.” 이것은 회개의 성찬이었다. 오랜만에 회개와 감격의 눈물이 쏟아졌다.
그 후에 단장 목사님은 “이제 이만열 교수님과 주선애 교수님께서 나오셔서 각각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하셨다. 나는 그 시간에 정말 말씀을 선포하고 싶어졌다. 나는 원래 내향성인데 말이다. 성령의 역사였다. 먼저 이만열 교수님은 교회사 교수님답게 말씀을 시작하셨다. “바로 이 평양성에서 우리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들으며 북한의 많은 순교자들을 생각나게 하셨다. 그다음 차례로 내가 말씀을 전해야 했다. 벅찬 가슴으로 앞에 나가 섰다. 많은 목사님, 장로님,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의 눈동자들이 나에게 쏠렸다.
“나는 바로 이곳 평양에서 나서 여기서 자랐고, 1948년에 핍박의 기운이 돌아 순교할 자신이 없어서 남한으로 도망갔었습니다. 50여년 만에 고향에 온 나는 마음이 착잡합니다. 곳곳마다 현수막은 ‘예수 부활하셨다’에 반하여 ‘수령님은 살아 계신다.’가 쓰여 있고, 집채 크기로 걸려 있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옛날 평양시는 오늘 같은 주일 아침이면 흰옷 입은 어른들이 우렁차게 언덕마다 울리는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구름떼 같이 올라가던 고장입니다. 오늘 평양 한복판에서 우렁차게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성읍을 회복하실 하나의 사인으로 믿어집니다. 남한으로 가기 전엔 고등부 학생들과 몰래 집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하면 창문에 이불을 걸고 가만히 소리를 죽여 가며 찬송을 부르곤 했는데 오늘 우리가 이렇게 우렁차게 부르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눈물이 납니다.
만일 우리가 오늘 이런 일이 없었다면 그저 봉수교회에 가서 예배 한 번 보고 왔다고 보고하게 될 것뿐인데 하나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모여 기도하게 하시는 것은 북한에 대해 무관심하고, 잘 먹고 잘 살면서 더 풍요만을 추구하던 우리 남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 회개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돌아갈까 봐 하나님께서 이런 특별한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전 7시부터 오후 2시까지 금식 기도 부흥회를 한 셈이다. 2시가 되어서 보위원은 이제 그만하고 봉수교회에 가라고 했다. 그때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점심을 늦게 먹고 봉수교회로 갔다. 그곳은 텅 비어 있었고 얼마 있다가 그 교회 목사라는 사람이 노동을 하다가 뛰어왔는지 앞에 서서 정치 선전 같은 말을 했다. 우리는 다시 우리 나름의 예배를 드리고 봉수교회를 떠났다. 교회 앞마당에는 평양신학교라고 쓰여 있는 집이 한 채가 있었다. 문은 굳게 닫쳐 있었다. 그 다음 칠골 교회를 다시 방문했다. 거기서도 목사라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하나도 없는 방만 텅 비어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이 고장 사람들이 멀찍이 서서 우리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접촉할 수 없게 한 모양이었다.
나는 한 가지 놀라운 일을 겪게 되었다. 만경대에 갔을 때 김일성이 자라났다고 하는 작은 옛날 농가로 들어갔다. 보이는 방안에 그의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강반석의 사진을 보는 순간 우리 육촌 주선길 오빠의 부인과 너무 닮은 것이 아닌가. 하지만 너무 뜻밖의 일이라서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며 가슴이 뛰었다. 생각해 보니 강반석은 우리 형님과 가까운 친척이 맞다. 강량욱 목사는 기독교연맹 위원장 또는 통일위원회 위원장 등을 한 것으로 안다. 어떻든 그 육촌 형님은 강량욱 목사를 친오빠라고 했는데, 지금 기억으로 강반석 하고는 아마도 친형제는 아니라도 4촌간이 되지 않는지 생각이 들었다.
만경대는 성역이라서 참배하러 줄을 서서 들어오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게 되어 있었다. 탈북자들을 통해 듣는 만경대 이야기는 이랬다. 김일성의 할아버지 김응우가 너무 가난해서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에 어떤 지주의 묘직이로 정착하여 살았다. 바로 이곳에서 김일성이 태어나 이를 기념하고자 만든 곳이 '만경대 고향집'이다.
그런데 나의 정의여학교 동창 김귀혁 권사(영락교회)의 어머니는 그 지주 딸로 그녀의 외가이다. 김권사는 총명하고 열정적 신앙을 가진 친구로 자기 남편이 치과의사를 하면서 소실을 얻고 사는 동안 뜨개질을 해서 자녀들을 키웠다. 그 고독하고 슬픈 세월을 성경 말씀을 외우면서 자녀 6남매를 다 교육시켰다. 지금 90세라 기억이 좀 감퇴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성경 100장을 끄떡없이 외우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설교를 하러 나가면 따라와서 그 성경을 외워주기도 했다.
고려 호텔에서 하루 밤을 더 지내고 그 다음 날은 평양 시내 관광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기대하며 밤을 지냈다. 옛날 흔적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관광안내자가 빵공장을 가야 하는데 빵기계가 고장이 나서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고아들에게 빵을 만들어주도록 한민족복지재단을 통해 여기 방문하러 온 교회 목사님들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에 빵 기계를 보여줄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빵 기계가 언제부터 고장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빵공장에는 가지 않았다. 오후에 빵을 만들어 우리들에게 가져왔는데 우리나라 제과점 빵과 같은 빵이다. 굶주린 아이들이나 먹일 것이지 왜 여기서 이 빵을 우리가 먹어야 하나 싶었다.
그 다음에 소년 궁전이라는 곳에 갔다. 굉장하게 만들어 놓고 예쁘고 똑똑한 아이들을 데려가 한 가지씩 전문적으로 재능을 훈련시키는 곳이었다. 아이들이 노래하며 율동하는 교실, 컴퓨터 몇 대 놓고 훈련하는 교실, 습자교실 등이 있었다. 이 시대에 습자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리고 연극장에서 발표하는 것 등을 관람하였다. 늘 호기심을 갖게 하던 옥류관! 그곳은 아름다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대동강 역시 내가 즐기며 건너다니던 모습이 아니었다. 건너편에 우뚝 서 있는 주체탑 그리고 모래사장이 일체 없어지고 강가로 둑을 만들어 옥류관은 배를 탄 것처럼 강위에 지어졌다. 왼쪽으로 보이는 모란봉은 옛날처럼 우뚝이 서 있지 않고 아파트에 감추어져 봉우리만 보였지만 나의 그리운 곳이었다.
내가 선교리에서 여학교를 시내로 매일 같이 건너다니던 대동강 다리였다. 그 다리는 여전하고 왼편으로 보이는 능라도도 반갑게 다가왔다. 나의 백부 주요남 장로님의 배려로 한두 번 요리 배를 타고 뱃놀이를 하던 일이 생각났다. 교회 어른들과 함께 즐기던 일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오른편에 보이는 양각도 섬은 교회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나무 그늘에서 죽을 쑤어 먹던 곳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주체탑이 또 서 있었다. 그리고 푸에블로 선 관람은 들어가기도 싫어 거절하고 밖에 서 있었다. 토마스 목사 순교 탑을 그들은 영미를 파멸시킨 자랑스러운 고장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반기독교적이었다. ‘하나님! 이 땅에 꽉 차 있는 악의 세력 무너뜨려 주소서!’ 속으로 기도하며 슬픈 마음으로 변해버린 평양시를 관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