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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를 지나며
하나님의 현존과 고독은 어디서나 누린다.
하나님의 현존과 위대하심에 대한
생생한 느낌을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보존할 수 있다.
대도시의 인산인해 속에서도 우리는
피조물로부터 떠나서 가장 외진 사막에서처럼
오로지 하나님과 더불어 친밀하게 지낼 수 있다.
피조물에게 애착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하나님만이 전부이고
하나님을 어디에서나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게 된다.
그에게 있어 장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 안에 숨은 생활」 중에서
나의 사막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사역이나 개인적인 연단의 시간들로 인해 숨어 지내는 시간을 보낸 이들이 꽤 많다. 예수님께서 40일간 금식하시며 공생애를 준비하시던 기간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숨어 지내며 하나님의 시간속으로 들어가서 훈련받는 기간이다. 짧거나 긴 각각의 시간들 속에 들어가서 나를 지우고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하나님 관점’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는 데 필요한 것은 그간 지내던 환경과 시간, 함께 하던 사람들, 장소 등이 불필요하기도 하다. 하던 일들을 멈추고 모든 것들을 벗어나는 일도 있다. 주님과 깊이 만나기 위해 주님이 아닌 것들을 벗어나는 이 성스러운 일을, 어떤 이들은 광야에 거하는 것으로 비유하기도 하고, 사막, 연단의 장소라고도 칭한다. 스스로 그 길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도 있고 주어진 환경에서 사역에 맞는 일들을 찾아 하나님 안으로 숨어들기도 한다. 사실 대도시의 인산인해 속에서도, 사막 같은 광야 무인지경에서도 오로지 하나님과 더불어 친밀하게 지낼 수 있어야 마땅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몹시 서툴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끔 우리 삶의 환경들을 사용하셔서 사막처럼 만들기도 하고, 광야처럼 만들기도 하신다. 그때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 순간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순종하여 보내면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모든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어 간다는 것은 날마다 하나님의 마음이 되어 간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처럼, 살고 죽는 것에 의미를 두고 거기에 집착하는 우리 삶이라면 그 인생이 얼마나 가치 없고 한없이 가벼울 뿐인가.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차지할 수 있다면, 그분이 전부가 될 수 있다면 사막이나 바다나 때론 위험이나 적신도 기꺼이 끌어안을 수 있었던 수많은 그들의 용기가 한없이 부러울 뿐이다. 그들의 전기를 읽으며, 그들의 거룩한 사랑과 담대한 용기에 감탄하면서 내 삶을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비교 불가다. 그렇다고 나의 삶을 다 접고 당장 그들처럼 사막으로 들어갈 것인가. 허황한 일이며 내게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 일이다.
어느 성자가 들어간 고독한 사막이 당장 내 삶에 펼쳐질 수 없다. 어느 영성가가 절제와 극기로 먹었다던 곰팡이 핀 감자도 내겐 합당하지 않다. 나의 사막은 지금 나의 환경이다. 내가 만나는 이들이 구원의 대상들이고 사랑의 대상들이다. 그들에게 최고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함께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야 한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겸손하신 주님의 손과 발처럼 일하고 걸어야 한다. 그 가운데 주님이 위대한 일을 이루어 가시리라. 내게 주어진 오늘, 주님처럼 가장 진리를 말하고, 모든 일에 진실하며, 세상에 계실 때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던 주님처럼, 우리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이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며 최선을 다하는 삶이 나의 경건한 사막이다.
하나님 안에 숨은 생활
구약의 대표적인 지도자 모세는,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미디안 광야에서 도망자로 지내야 했다. 당시 미디안이 애굽의 세력권 내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모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광야에서 양 치는 일뿐이었다. 모세가 광야에서 보내는 동안 할 수 있었던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성경은 별다른 언급 없이 “그 기간 동안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 떼를 쳤다”라고만 간단하게 말해준다. 우리가 다윗의 생애 중 주목하는 곳은 사울 왕과 추종 세력에 의해 쫓기던 13년간의 세월이다. 숨어 지내던 아둘람 굴에서 세워진 공동체는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하나님의 작업공간이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수도원 꼭대기 방에서 ‘사랑의 하나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소리 높이게 되었다. 루터는 편지 말미에 ‘광야에서’ 또는 ‘밧모 섬에서’라고 적었다고 한다. 광야와 밧모섬 같이 마귀와 싸웠던 곳이고 에게해 밧모 섬 감옥에 갇혀있던 사도 요한의 심정과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종교개혁이라는 절체절명의 사명을 눈앞에 둔 그는 극심한 마귀 공격을 받았고, 육체적 고통도 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감옥이나 광야처럼 고독하고 힘든 나날 속에서도 그 공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이었기에 누구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 안에 숨은 생활’을 하는 장소였다. 루터는 육체적 고통과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 와중에 독일어로 성경 번역을 했고, 1534년에 출간된 루터의 신·구약 독일어 성경은 무려 50만 부 넘게 팔리며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루터는 하나님과 숨어 지낸 그 공간에서 다음과 같은 어록을 남겼다. “우리의 권능이 들어올 때 하나님의 권능이 나가고, 우리의 권능이 나갈 때 하나님의 권능이 들어온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뿐이다. 그분에게 숨어 모든 것을 내어놓고 나를 비우라. 그리하면 나는 모든 권능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안으로 더 깊이 숨어드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람들 눈치, 관계, 내 단체, 명예, 이익을 저울질하다 보면 나는 언제까지고 하나님 안으로 숨어들 수 없다. 하나님 안에 숨어드는 것은 누가 하나님을 차지할 것인가의 절실함이다.
너는 누구냐
사도행전 19장 1절 이하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능력을 주었더니 사도 바울의 앞치마만 갖다가 병약한 자에게 얹어도 병이 낫고 귀신이 물러갔다. 이것을 부럽게 생각했던 한 유대인이 귀신 들린 자를 만나 외쳤다. “내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해 너에게 명령하노니 귀신아, 물러가라.” 그랬더니 귀신이 하는 얘기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 이 질문을 나에게 던져봐야겠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삶을 의탁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지 않고, 거룩한 보혈의 능력도, 복음의 능력도, 말씀의 권능도, 성령의 치료하는 광선도 알지 못하는 너는 누구란 말이냐? 고독한 삶보다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즐기고, 정과 욕심을 은밀하게 즐기면서 경건의 능력을 말로만 외치는 너는 누구냐? 악한 귀신 들린 자가 바울 흉내 내는 유대인을 때려 엎어놓고 옷을 벗기고 할퀴니까 발가벗고 도망가더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주장하는 바울에게 베스도 총독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되는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라고 담대히 답한다. 학문이 뛰어나고 아까운 사도 바울이기에 신앙고백을 철회하기를 기대하며 압박했지만, 바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1세기 로마의 서슬 퍼런 칼날이 기독교인들 향한 이유는 간단했다. 로마의 황제가 “주인”인데 기독교인들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모진 고문에도 한결같이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똑같이 대답했다.
오늘 광야를 지나는 ‘그리스도인’이라 자부하던 나에게 다시 진실하게 질문해 보도록 하자.
“너는 누구냐?”
“너의 주인은 누구냐?”
이순화
하나님의 현존과 고독은 어디서나 누린다.
하나님의 현존과 위대하심에 대한
생생한 느낌을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보존할 수 있다.
대도시의 인산인해 속에서도 우리는
피조물로부터 떠나서 가장 외진 사막에서처럼
오로지 하나님과 더불어 친밀하게 지낼 수 있다.
피조물에게 애착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하나님만이 전부이고
하나님을 어디에서나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게 된다.
그에게 있어 장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 안에 숨은 생활」 중에서
나의 사막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사역이나 개인적인 연단의 시간들로 인해 숨어 지내는 시간을 보낸 이들이 꽤 많다. 예수님께서 40일간 금식하시며 공생애를 준비하시던 기간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숨어 지내며 하나님의 시간속으로 들어가서 훈련받는 기간이다. 짧거나 긴 각각의 시간들 속에 들어가서 나를 지우고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하나님 관점’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는 데 필요한 것은 그간 지내던 환경과 시간, 함께 하던 사람들, 장소 등이 불필요하기도 하다. 하던 일들을 멈추고 모든 것들을 벗어나는 일도 있다. 주님과 깊이 만나기 위해 주님이 아닌 것들을 벗어나는 이 성스러운 일을, 어떤 이들은 광야에 거하는 것으로 비유하기도 하고, 사막, 연단의 장소라고도 칭한다. 스스로 그 길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도 있고 주어진 환경에서 사역에 맞는 일들을 찾아 하나님 안으로 숨어들기도 한다. 사실 대도시의 인산인해 속에서도, 사막 같은 광야 무인지경에서도 오로지 하나님과 더불어 친밀하게 지낼 수 있어야 마땅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몹시 서툴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끔 우리 삶의 환경들을 사용하셔서 사막처럼 만들기도 하고, 광야처럼 만들기도 하신다. 그때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 순간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순종하여 보내면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모든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어 간다는 것은 날마다 하나님의 마음이 되어 간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처럼, 살고 죽는 것에 의미를 두고 거기에 집착하는 우리 삶이라면 그 인생이 얼마나 가치 없고 한없이 가벼울 뿐인가.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차지할 수 있다면, 그분이 전부가 될 수 있다면 사막이나 바다나 때론 위험이나 적신도 기꺼이 끌어안을 수 있었던 수많은 그들의 용기가 한없이 부러울 뿐이다. 그들의 전기를 읽으며, 그들의 거룩한 사랑과 담대한 용기에 감탄하면서 내 삶을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비교 불가다. 그렇다고 나의 삶을 다 접고 당장 그들처럼 사막으로 들어갈 것인가. 허황한 일이며 내게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 일이다.
어느 성자가 들어간 고독한 사막이 당장 내 삶에 펼쳐질 수 없다. 어느 영성가가 절제와 극기로 먹었다던 곰팡이 핀 감자도 내겐 합당하지 않다. 나의 사막은 지금 나의 환경이다. 내가 만나는 이들이 구원의 대상들이고 사랑의 대상들이다. 그들에게 최고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함께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야 한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겸손하신 주님의 손과 발처럼 일하고 걸어야 한다. 그 가운데 주님이 위대한 일을 이루어 가시리라. 내게 주어진 오늘, 주님처럼 가장 진리를 말하고, 모든 일에 진실하며, 세상에 계실 때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던 주님처럼, 우리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이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며 최선을 다하는 삶이 나의 경건한 사막이다.
하나님 안에 숨은 생활
구약의 대표적인 지도자 모세는,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미디안 광야에서 도망자로 지내야 했다. 당시 미디안이 애굽의 세력권 내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모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광야에서 양 치는 일뿐이었다. 모세가 광야에서 보내는 동안 할 수 있었던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성경은 별다른 언급 없이 “그 기간 동안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 떼를 쳤다”라고만 간단하게 말해준다. 우리가 다윗의 생애 중 주목하는 곳은 사울 왕과 추종 세력에 의해 쫓기던 13년간의 세월이다. 숨어 지내던 아둘람 굴에서 세워진 공동체는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하나님의 작업공간이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수도원 꼭대기 방에서 ‘사랑의 하나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소리 높이게 되었다. 루터는 편지 말미에 ‘광야에서’ 또는 ‘밧모 섬에서’라고 적었다고 한다. 광야와 밧모섬 같이 마귀와 싸웠던 곳이고 에게해 밧모 섬 감옥에 갇혀있던 사도 요한의 심정과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종교개혁이라는 절체절명의 사명을 눈앞에 둔 그는 극심한 마귀 공격을 받았고, 육체적 고통도 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감옥이나 광야처럼 고독하고 힘든 나날 속에서도 그 공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이었기에 누구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 안에 숨은 생활’을 하는 장소였다. 루터는 육체적 고통과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 와중에 독일어로 성경 번역을 했고, 1534년에 출간된 루터의 신·구약 독일어 성경은 무려 50만 부 넘게 팔리며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루터는 하나님과 숨어 지낸 그 공간에서 다음과 같은 어록을 남겼다. “우리의 권능이 들어올 때 하나님의 권능이 나가고, 우리의 권능이 나갈 때 하나님의 권능이 들어온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뿐이다. 그분에게 숨어 모든 것을 내어놓고 나를 비우라. 그리하면 나는 모든 권능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안으로 더 깊이 숨어드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람들 눈치, 관계, 내 단체, 명예, 이익을 저울질하다 보면 나는 언제까지고 하나님 안으로 숨어들 수 없다. 하나님 안에 숨어드는 것은 누가 하나님을 차지할 것인가의 절실함이다.
너는 누구냐
사도행전 19장 1절 이하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능력을 주었더니 사도 바울의 앞치마만 갖다가 병약한 자에게 얹어도 병이 낫고 귀신이 물러갔다. 이것을 부럽게 생각했던 한 유대인이 귀신 들린 자를 만나 외쳤다. “내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해 너에게 명령하노니 귀신아, 물러가라.” 그랬더니 귀신이 하는 얘기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 이 질문을 나에게 던져봐야겠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삶을 의탁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지 않고, 거룩한 보혈의 능력도, 복음의 능력도, 말씀의 권능도, 성령의 치료하는 광선도 알지 못하는 너는 누구란 말이냐? 고독한 삶보다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즐기고, 정과 욕심을 은밀하게 즐기면서 경건의 능력을 말로만 외치는 너는 누구냐? 악한 귀신 들린 자가 바울 흉내 내는 유대인을 때려 엎어놓고 옷을 벗기고 할퀴니까 발가벗고 도망가더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주장하는 바울에게 베스도 총독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되는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라고 담대히 답한다. 학문이 뛰어나고 아까운 사도 바울이기에 신앙고백을 철회하기를 기대하며 압박했지만, 바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1세기 로마의 서슬 퍼런 칼날이 기독교인들 향한 이유는 간단했다. 로마의 황제가 “주인”인데 기독교인들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모진 고문에도 한결같이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똑같이 대답했다.
오늘 광야를 지나는 ‘그리스도인’이라 자부하던 나에게 다시 진실하게 질문해 보도록 하자.
“너는 누구냐?”
“너의 주인은 누구냐?”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