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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화살표를 따라 가볍게 가리라
주일 아침, 교회까지 50분 남짓을 걸어갔다. 함께 걷던 한 자매가 봄이 되니까 묵직한 겨울옷보다 옷이 가벼워서 한결 편하다고 했다. “그러게요. 옷도 가벼우니까 발걸음도 더 경쾌해지는 것 같아요.”라며 대화를 주고받는데, 소설가 서영은의 산티아고 순례기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에 나오는 글들이 마음에 떠올랐다.
그녀는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고 또 걷다 보니 허벅지도 당기고, 중심을 잃고 무엇엔가 걸려 넘어질 뻔하면서 몇 차례를 비틀거렸다. 길이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고 갑자기 허기와 고달픔이 밀려왔다. 고달픔이 밀려오자 감사와 기도는 자취를 감추고 불만이 고개를 쳐들었다.
떠날 때부터 매달려 덜렁거리는 필름 카메라의 무게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담이 되었다. 낙타가 주저앉을 때는 짐 위에 얹어진 지푸라기 하나 때문이라는 말이 실감될 즈음, 카메라를 비닐에 싸고 가죽케이스는 벗겨 수풀에 던져버렸다. 하룻밤을 잔 후 또다시 길 위에 섰을 때, 무엇을 버릴까 또 고민하였다. 고심 끝에 빈 비닐봉지 하나, 누빈 옷 가방, 약봉지 하나, 이쑤시개 두 개를 버렸다. 아까운 것보다 꼭 필요한 것을 버리기가 더 망설여졌지만, 계속 걷기 위해서는 짐의 무게를 덜어내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배낭의 무게가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녀는 길을 안내하던 후배에게 충고를 듣고서는 속으로 부글거리던 불만이 일시에 멈추었다. “선생님은 이 길을 걷는 자세가 안 되어 있어요. 첫째, 음식 사치가 심하고, 둘째, 주문한 음식을 남기는 것, 그리고 자꾸 차를 타고 싶어 하는 것.” 그녀가 말한 ‘순례자의 자세’라는 것이 무엇인지 한순간에 읽어낼 수 있었다. ‘음식, 극도로 간소해요. 옷차림, 옛날 순례자들은 단벌이었어요. 잠자리, 물론 불편하죠. 그나마도 못하면 노천에서도 잘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런 것을 고생스럽다고 여기면 이 길을 걸을 필요가 없어요.’라고 눈빛으로 말하는 듯했다.
많이 공감되는 내용이다. 우리는 거친 들로 부름을 받은 순례자이다(호2:14). 마라톤과 같은 긴 믿음의 여정을 완주하려면 가벼워야 한다. 다윗이 무거운 갑옷과 투구를 벗고 전쟁터에 나갔던 것처럼, 영적 전쟁터와 같은 광야에서 승리하려면 세상의 것을 과감히 벗어 던져야 한다.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은 「정통」이라는 책에서 “새가 본성상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은 허약함이 곧 힘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힘 안에는 일종의 가벼움, 스스로 공중에 있을 수 있는 경쾌함이 있다. 위대한 성자들의 특징은 가벼워질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천사들이 날 수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을 가볍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우리 영혼도 하늘 높이 날아오르려면 빈 그릇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것들을 잔뜩 걸쳐 입고서는 천국에 다다를 수가 없다. 하늘의 보화를 얻으려면 모든 소유를 다 버리고 가벼워져야 한다. 그러려면 불편함을 참아가며 단벌의 순례자들처럼 필요한 것까지 아낌없이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것을 버리고 가볍게 광야 길을 걸으셨던 위대한 한 분이 우리 앞에 서 계시다.
이집트 영성가 성 안토니오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스무 살에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여 마음이 무겁게 되었다. 하나는 부모의 죽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재산과 유산을 물려받게 된 것이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은 어느 주일, 성전으로 가던 길에서 이런 의문들이 그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어떻게 사도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을까? 사도행전에 쓰인 대로 초대교회 신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전 재산을 포기하고 사도들에게 내어놓았을까? 그들이 하늘나라에서 얻으리라고 희망한 상급은 얼마나 컸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성전에 들어섰는데, 마침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모두 버리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시는 말씀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훗날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자신에게 이러한 말씀을 직접 하시는 것 같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곧바로 집에 돌아가 부모로부터 받은 약 37만 평의 토지와 모든 유산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여타의 재산 중 약간만 여동생에게 남겨주었다. 그런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에 결국 동생을 위해 남겨둔 재산마저 모조리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버렸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길 결심하고, 사막으로 나가 15년 동안 아주 적은 양의 음식만 먹고 노동과 기도 그리고 성경 읽기에 전념하였다. 그 후 35세 즈음에 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 20년간 혼자 영성생활을 하며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을 찾는 데 정진하였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뛰어난 성덕이 세상으로 퍼져나가 많은 젊은이들이 제자가 되기를 간청하게 되었다. 마침내 깊은 침묵과 고독의 은수생활을 끝내고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부질없는 욕망 때문에 흔들리지도 않았고, 자신을 환영하는 데도 우쭐해지지 않았다. 그의 일대기를 쓴 아타나시오에 의하면 “그는 결코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다. 그의 영혼은 평온함을 유지하였으며, 절대로 우울하게 보이지 않았고, 마음은 즐거웠다.”고 했다.
한번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서한을 보내어 공식적으로 크리스천을 공인했던 제국의 행정에 관한 충고를 모색했다. 그때 제자들에게 “황제가 우리들에게 편지를 썼다고 해서 놀라지 말라. 그도 한 인간일 뿐이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한 규정을 썼으며,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다는 점을 놀라워하라.”고 하였다. 도무지 명예에는 관심이 없었던 그는 다음과 같이 황제에게 답장을 보냈다. “현재를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다가오게 될 심판을 기억할 것이며, 그리스도만이 진정으로 ‘영원한 왕’이라는 점을 아십시오.” 황제가 그를 직접 찾아왔을 때는 짧은 한마디를 할 뿐이었다. “돼지는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다.” 그 말에 황제는 “하늘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성찰하지 않으면 돼지와 같다.”는 깨달음을 얻고 돌아갔다.
안토니오는 말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저녁때까지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고, 저녁에 잘 때는 아침에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숨은 오직 주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만물은 주님을 통해서 존재한다(고전8:6) 순례자에게 이 세상은 잠시 스쳐가는 정거장일 뿐이다. 허영심과 자존심으로 남을 의식하는 무게의 짐도 벗어버리고, 교만과 게으름과 음란과 질투와 포악과 이기심과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도 말끔히 비워내자. 움켜쥐었던 손을 펴서 하늘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깊이 성찰해보자. 나는 얼마나 천국에 이르기 위해 열심히 세상의 것을 버리고 있는가.
무거운 짐들을 다 짊어지고 순례길을 가면 짐도 무겁고 순례길도 무겁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철저히 못 박으면 박을수록, 우리 영혼은 더 가볍게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으리라. 주님을 뵈옵는 그날을 소망하며 십자가 화살표를 따라 고단하고 불편해도 쉼 없이 걷고 또 걷자. 버리고 버리면서 가볍고 경쾌하게.
이지영
주일 아침, 교회까지 50분 남짓을 걸어갔다. 함께 걷던 한 자매가 봄이 되니까 묵직한 겨울옷보다 옷이 가벼워서 한결 편하다고 했다. “그러게요. 옷도 가벼우니까 발걸음도 더 경쾌해지는 것 같아요.”라며 대화를 주고받는데, 소설가 서영은의 산티아고 순례기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에 나오는 글들이 마음에 떠올랐다.
그녀는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고 또 걷다 보니 허벅지도 당기고, 중심을 잃고 무엇엔가 걸려 넘어질 뻔하면서 몇 차례를 비틀거렸다. 길이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고 갑자기 허기와 고달픔이 밀려왔다. 고달픔이 밀려오자 감사와 기도는 자취를 감추고 불만이 고개를 쳐들었다.
떠날 때부터 매달려 덜렁거리는 필름 카메라의 무게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담이 되었다. 낙타가 주저앉을 때는 짐 위에 얹어진 지푸라기 하나 때문이라는 말이 실감될 즈음, 카메라를 비닐에 싸고 가죽케이스는 벗겨 수풀에 던져버렸다. 하룻밤을 잔 후 또다시 길 위에 섰을 때, 무엇을 버릴까 또 고민하였다. 고심 끝에 빈 비닐봉지 하나, 누빈 옷 가방, 약봉지 하나, 이쑤시개 두 개를 버렸다. 아까운 것보다 꼭 필요한 것을 버리기가 더 망설여졌지만, 계속 걷기 위해서는 짐의 무게를 덜어내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배낭의 무게가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녀는 길을 안내하던 후배에게 충고를 듣고서는 속으로 부글거리던 불만이 일시에 멈추었다. “선생님은 이 길을 걷는 자세가 안 되어 있어요. 첫째, 음식 사치가 심하고, 둘째, 주문한 음식을 남기는 것, 그리고 자꾸 차를 타고 싶어 하는 것.” 그녀가 말한 ‘순례자의 자세’라는 것이 무엇인지 한순간에 읽어낼 수 있었다. ‘음식, 극도로 간소해요. 옷차림, 옛날 순례자들은 단벌이었어요. 잠자리, 물론 불편하죠. 그나마도 못하면 노천에서도 잘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런 것을 고생스럽다고 여기면 이 길을 걸을 필요가 없어요.’라고 눈빛으로 말하는 듯했다.
많이 공감되는 내용이다. 우리는 거친 들로 부름을 받은 순례자이다(호2:14). 마라톤과 같은 긴 믿음의 여정을 완주하려면 가벼워야 한다. 다윗이 무거운 갑옷과 투구를 벗고 전쟁터에 나갔던 것처럼, 영적 전쟁터와 같은 광야에서 승리하려면 세상의 것을 과감히 벗어 던져야 한다.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은 「정통」이라는 책에서 “새가 본성상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은 허약함이 곧 힘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힘 안에는 일종의 가벼움, 스스로 공중에 있을 수 있는 경쾌함이 있다. 위대한 성자들의 특징은 가벼워질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천사들이 날 수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을 가볍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우리 영혼도 하늘 높이 날아오르려면 빈 그릇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것들을 잔뜩 걸쳐 입고서는 천국에 다다를 수가 없다. 하늘의 보화를 얻으려면 모든 소유를 다 버리고 가벼워져야 한다. 그러려면 불편함을 참아가며 단벌의 순례자들처럼 필요한 것까지 아낌없이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것을 버리고 가볍게 광야 길을 걸으셨던 위대한 한 분이 우리 앞에 서 계시다.
이집트 영성가 성 안토니오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스무 살에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여 마음이 무겁게 되었다. 하나는 부모의 죽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재산과 유산을 물려받게 된 것이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은 어느 주일, 성전으로 가던 길에서 이런 의문들이 그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어떻게 사도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을까? 사도행전에 쓰인 대로 초대교회 신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전 재산을 포기하고 사도들에게 내어놓았을까? 그들이 하늘나라에서 얻으리라고 희망한 상급은 얼마나 컸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성전에 들어섰는데, 마침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모두 버리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시는 말씀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훗날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자신에게 이러한 말씀을 직접 하시는 것 같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곧바로 집에 돌아가 부모로부터 받은 약 37만 평의 토지와 모든 유산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여타의 재산 중 약간만 여동생에게 남겨주었다. 그런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에 결국 동생을 위해 남겨둔 재산마저 모조리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버렸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길 결심하고, 사막으로 나가 15년 동안 아주 적은 양의 음식만 먹고 노동과 기도 그리고 성경 읽기에 전념하였다. 그 후 35세 즈음에 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 20년간 혼자 영성생활을 하며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을 찾는 데 정진하였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뛰어난 성덕이 세상으로 퍼져나가 많은 젊은이들이 제자가 되기를 간청하게 되었다. 마침내 깊은 침묵과 고독의 은수생활을 끝내고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부질없는 욕망 때문에 흔들리지도 않았고, 자신을 환영하는 데도 우쭐해지지 않았다. 그의 일대기를 쓴 아타나시오에 의하면 “그는 결코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다. 그의 영혼은 평온함을 유지하였으며, 절대로 우울하게 보이지 않았고, 마음은 즐거웠다.”고 했다.
한번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서한을 보내어 공식적으로 크리스천을 공인했던 제국의 행정에 관한 충고를 모색했다. 그때 제자들에게 “황제가 우리들에게 편지를 썼다고 해서 놀라지 말라. 그도 한 인간일 뿐이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한 규정을 썼으며,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다는 점을 놀라워하라.”고 하였다. 도무지 명예에는 관심이 없었던 그는 다음과 같이 황제에게 답장을 보냈다. “현재를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다가오게 될 심판을 기억할 것이며, 그리스도만이 진정으로 ‘영원한 왕’이라는 점을 아십시오.” 황제가 그를 직접 찾아왔을 때는 짧은 한마디를 할 뿐이었다. “돼지는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다.” 그 말에 황제는 “하늘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성찰하지 않으면 돼지와 같다.”는 깨달음을 얻고 돌아갔다.
안토니오는 말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저녁때까지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고, 저녁에 잘 때는 아침에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숨은 오직 주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만물은 주님을 통해서 존재한다(고전8:6) 순례자에게 이 세상은 잠시 스쳐가는 정거장일 뿐이다. 허영심과 자존심으로 남을 의식하는 무게의 짐도 벗어버리고, 교만과 게으름과 음란과 질투와 포악과 이기심과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도 말끔히 비워내자. 움켜쥐었던 손을 펴서 하늘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깊이 성찰해보자. 나는 얼마나 천국에 이르기 위해 열심히 세상의 것을 버리고 있는가.
무거운 짐들을 다 짊어지고 순례길을 가면 짐도 무겁고 순례길도 무겁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철저히 못 박으면 박을수록, 우리 영혼은 더 가볍게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으리라. 주님을 뵈옵는 그날을 소망하며 십자가 화살표를 따라 고단하고 불편해도 쉼 없이 걷고 또 걷자. 버리고 버리면서 가볍고 경쾌하게.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