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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 우리 집
며칠 전 오래 알고 지내던 분당의 모 교회 집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목사님, 저희 친정엄마께서 어제 오전 천국으로 떠나셨어요. 기도 부탁드립니다.” 75세의 연세에도 여 선교회장을 하시면서 교회를 섬기고, 일생을 기도로 살면서 자녀들을 양육하셔서 순주들까지도 할머니의 신앙을 따르고 존경받는 삶을 사신 신실한 권사님이셨다. “권사님이 드디어 천국 집으로 가셨군요.” 답장을 하고 천국에 가실 권사님을 위해 기도하며 삶을 생각하고 천국에 들어갈 소망을 가지니 마음이 뭉클했다. 얼마나 사모되고 그리운 나라 천국인가.
최근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신도시 투기 의혹으로 온 나라가 공분으로 들끓고 있다. 공평과 정의, 정직이 무너지는 사태를 보는 답답한 마음이 일면서도, 신앙인들에게 더욱 사모할 것은 영원한 하늘나라 내 아버지 집뿐임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땅 분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각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는 과정이 나오는데, 그 방법이 참 신기하고 놀랍기만 하다. 먼저 제비뽑기를 통해 각 지파의 대략적인 위치와 지경을 정한다(민26:52-56). 뒤이어 파생되는 지엽적인 문제들을 재차 조정한다. 이렇게 분배된 각 지파의 기업들은 야곱의 축복 예언에서 언급되었던 내용(창49:1-28)과 모세의 유언적 예언(신33:1-29)과 거의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원칙이 있었기에 불평 없이 순조롭게 땅 분배가 진행되었다. 각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면서 경계선을 정해 주었는데, 므낫세의 반 지파가 거할 땅의 크기가 르우벤과 갓 지파에게 배분된 땅을 합한 것보다 더 큰 것을 알 수 있다. 지도를 봐도 그 크기가 확연히 비교된다. 보통의 관점이라면 어떤 지파가 더 큰 땅을 차지하느냐, 무엇 때문이냐, 내가 더 공을 세웠다, 이러저러한 불만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냐고, 묻지 않는다. 각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였지만 분배의 타당한 근거는 전혀 나와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땅 분배를 주셨으니 그것이 매우 합당한 근거가 될 뿐이다.
사람은 각자의 생각이 다르고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불만을 제기한다. 그것의 근거가 명확하면 할수록 더 여론의 힘을 얻는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사실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닫기 위해 지혜로워야 하고, 믿음의 삶에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것이다. 땅의 크기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데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말씀에 따라 그것을 기준삼고 규칙삼아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이 공평한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상 받는 나라다. 행한 대로, 일한대로 주어지는 공평의 상이 있다.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분도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그 일을 성취하여 마침내 각자에게 분배하신 분 역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확인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 분배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선한 싸움을 다 싸운 후 장차 들어가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게 하는 거룩한 모형이다.
하늘나라 성도의 본분
사도행전에 보면, 예루살렘 의회에서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연설한 것 때문에 유대인들의 반감을 사는 바울의 내용이 나온다. 그들은 바울을 없애 버리자며 큰 소동을 일으키고 천부장은 질서유지를 위해 바울을 채찍질하면서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바울이 “판결도 받지 않은 로마 사람을 채찍질 하는 것이 합법입니까?”라고 항변했고, 채찍을 가하려던 백부장이 깜짝 놀라 보고하자, 천부장은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을 결박해 놓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두려워한다. 곧 40명이 넘는 열혈 유대교인들이 ‘바울 죽이기’ 음모를 꾸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 보병 200명, 기병 70명, 창병 200명을 동원하여 벨릭스 총독이 있는 가이사랴로 바울을 호송하게 한다(행23:12~24). ‘로마 시민권’이 가진 높은 지위와 특권을 대변해 준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갖는 ‘더 좋은’ 권리 곧, 하늘 시민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애타게 전파한다. 자신이 배설물로 버린 것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치’를 두고 추구하는 것을 보며 바울은 눈물이 날만큼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바울은 소아시아와 시리아의 접경지에서 가까운 길리기아 다소(Tarseu)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인 그가 태어나자마자 로마 사람이었다는 것은, 사회지도층에 있었던 선대(先代)로부터 로마 시민권의 권리가 상속된 것이다. 나면서부터 주어진 환경은 삶의 능력으로 대변되는 오늘날이다. 달란트와 재산, 환경 등에 더 집중이 되니, 좋은 성품이나 가치관은 뒷전으로 물러나기 일쑤인 세상이다. 돈이 최고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하늘나라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은 실로 막중한 책임이 따른다. 천부장과 같은 이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려면 로마시민권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영적능력과 가치관이 있음을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가치관을 만족시키기 위해 물질축복이나 사회적 명성을 주님이 주신다고 백번 말해야 울리는 종소리가 될 뿐이다. 바울이 이미 답을 주었듯, 하늘나라 시민권이 가지는 특권과 의미를 전해주어야 하는 데, 설득력을 가지려면 삶으로 보여주며 말해야 하는 것이다.
본향을 향하여
베드로는 ‘행인과 나그네’의 가치로, 사도바울은 ‘영원한 하늘나라의 시민’ 다운 삶을 살라고 권면하신다. 이 땅에서 어떤 마음과 삶으로 살아야 하는지 구분 지어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영원할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 할 수밖에 없다. 천국소망을 놓아버리면 우리의 삶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될 수도 있다. 누리고 소유하지 못한 것들 때문에 불안하고 두렵기도 할 것이다. 내 삶에 연민을 느낄 수도 있다.
나그네의 헬라어 “파로이코스”는 시민권 없이 살아가는 외국인을 지칭하는 법적 용어이다. 한곳에 머물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의미한다. 성도는 하늘의 시민권을 갖고 있는 자이기에 이 땅에서의 일시적 삶에 큰 미련을 두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성도들이 많은 오해를 받은 이유는, 로마 황제의 명령을 거역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AD64년에 로마에 일어난 화제의 주범을 그리스도인으로 몰아서 박해를 가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악으로 맞대응 하지 말고 선으로 대하며 하늘나라 시민권자 다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권면한 것이다.
사도바울이 배설물로 여긴 것들을 간간히 부러워하고 추구하는 마음들, 이 땅에서 누려야 하는 최소한의 기준을 나름 세워 놓고 타인에게는 숨겨놓은 마음들, 부정과 거짓에 동조하고 선동하는 마음들, 이기적이 계산이 세워진 행보들을 모두 내려놓고, 정직하게 하나님 앞으로 가는 천국 시민으로 살아야 한다. 모든 시선이 본향이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국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놀랍고 위대하다.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고,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며,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고 다시 저주가 없고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계22:1-5)
이 땅의 가치로 여겨지는 것들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순결하고 거룩한 이름들이 가득히, 하나님의 영광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 천국, 영원한 우리의 본향이다.
세상의 모든 삶을 다 부정하고 나쁜 것으로 규정짓는 것이 아니지만, 세상의 것들은 하나님 나라에 상반되는 것들이 많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늘나라에서는 무용지물이고 무가치한 것들인데,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은 우리가 거기에 마음을 둔다면 이율배반이고 모순이 된다. 거룩한 땅을 분배받는 그날까지, 하나님 앞에 더 정직하기를 다짐해 본다.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 우리 집을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고 기쁘기를, 더 그리움으로 가득하기를 소원한다.
이순화
며칠 전 오래 알고 지내던 분당의 모 교회 집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목사님, 저희 친정엄마께서 어제 오전 천국으로 떠나셨어요. 기도 부탁드립니다.” 75세의 연세에도 여 선교회장을 하시면서 교회를 섬기고, 일생을 기도로 살면서 자녀들을 양육하셔서 순주들까지도 할머니의 신앙을 따르고 존경받는 삶을 사신 신실한 권사님이셨다. “권사님이 드디어 천국 집으로 가셨군요.” 답장을 하고 천국에 가실 권사님을 위해 기도하며 삶을 생각하고 천국에 들어갈 소망을 가지니 마음이 뭉클했다. 얼마나 사모되고 그리운 나라 천국인가.
최근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신도시 투기 의혹으로 온 나라가 공분으로 들끓고 있다. 공평과 정의, 정직이 무너지는 사태를 보는 답답한 마음이 일면서도, 신앙인들에게 더욱 사모할 것은 영원한 하늘나라 내 아버지 집뿐임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땅 분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각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는 과정이 나오는데, 그 방법이 참 신기하고 놀랍기만 하다. 먼저 제비뽑기를 통해 각 지파의 대략적인 위치와 지경을 정한다(민26:52-56). 뒤이어 파생되는 지엽적인 문제들을 재차 조정한다. 이렇게 분배된 각 지파의 기업들은 야곱의 축복 예언에서 언급되었던 내용(창49:1-28)과 모세의 유언적 예언(신33:1-29)과 거의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원칙이 있었기에 불평 없이 순조롭게 땅 분배가 진행되었다. 각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면서 경계선을 정해 주었는데, 므낫세의 반 지파가 거할 땅의 크기가 르우벤과 갓 지파에게 배분된 땅을 합한 것보다 더 큰 것을 알 수 있다. 지도를 봐도 그 크기가 확연히 비교된다. 보통의 관점이라면 어떤 지파가 더 큰 땅을 차지하느냐, 무엇 때문이냐, 내가 더 공을 세웠다, 이러저러한 불만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냐고, 묻지 않는다. 각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였지만 분배의 타당한 근거는 전혀 나와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땅 분배를 주셨으니 그것이 매우 합당한 근거가 될 뿐이다.
사람은 각자의 생각이 다르고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불만을 제기한다. 그것의 근거가 명확하면 할수록 더 여론의 힘을 얻는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사실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닫기 위해 지혜로워야 하고, 믿음의 삶에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것이다. 땅의 크기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데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말씀에 따라 그것을 기준삼고 규칙삼아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이 공평한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상 받는 나라다. 행한 대로, 일한대로 주어지는 공평의 상이 있다.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분도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그 일을 성취하여 마침내 각자에게 분배하신 분 역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확인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 분배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선한 싸움을 다 싸운 후 장차 들어가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게 하는 거룩한 모형이다.
하늘나라 성도의 본분
사도행전에 보면, 예루살렘 의회에서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연설한 것 때문에 유대인들의 반감을 사는 바울의 내용이 나온다. 그들은 바울을 없애 버리자며 큰 소동을 일으키고 천부장은 질서유지를 위해 바울을 채찍질하면서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바울이 “판결도 받지 않은 로마 사람을 채찍질 하는 것이 합법입니까?”라고 항변했고, 채찍을 가하려던 백부장이 깜짝 놀라 보고하자, 천부장은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을 결박해 놓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두려워한다. 곧 40명이 넘는 열혈 유대교인들이 ‘바울 죽이기’ 음모를 꾸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 보병 200명, 기병 70명, 창병 200명을 동원하여 벨릭스 총독이 있는 가이사랴로 바울을 호송하게 한다(행23:12~24). ‘로마 시민권’이 가진 높은 지위와 특권을 대변해 준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갖는 ‘더 좋은’ 권리 곧, 하늘 시민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애타게 전파한다. 자신이 배설물로 버린 것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치’를 두고 추구하는 것을 보며 바울은 눈물이 날만큼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바울은 소아시아와 시리아의 접경지에서 가까운 길리기아 다소(Tarseu)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인 그가 태어나자마자 로마 사람이었다는 것은, 사회지도층에 있었던 선대(先代)로부터 로마 시민권의 권리가 상속된 것이다. 나면서부터 주어진 환경은 삶의 능력으로 대변되는 오늘날이다. 달란트와 재산, 환경 등에 더 집중이 되니, 좋은 성품이나 가치관은 뒷전으로 물러나기 일쑤인 세상이다. 돈이 최고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하늘나라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은 실로 막중한 책임이 따른다. 천부장과 같은 이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려면 로마시민권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영적능력과 가치관이 있음을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가치관을 만족시키기 위해 물질축복이나 사회적 명성을 주님이 주신다고 백번 말해야 울리는 종소리가 될 뿐이다. 바울이 이미 답을 주었듯, 하늘나라 시민권이 가지는 특권과 의미를 전해주어야 하는 데, 설득력을 가지려면 삶으로 보여주며 말해야 하는 것이다.
본향을 향하여
베드로는 ‘행인과 나그네’의 가치로, 사도바울은 ‘영원한 하늘나라의 시민’ 다운 삶을 살라고 권면하신다. 이 땅에서 어떤 마음과 삶으로 살아야 하는지 구분 지어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영원할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 할 수밖에 없다. 천국소망을 놓아버리면 우리의 삶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될 수도 있다. 누리고 소유하지 못한 것들 때문에 불안하고 두렵기도 할 것이다. 내 삶에 연민을 느낄 수도 있다.
나그네의 헬라어 “파로이코스”는 시민권 없이 살아가는 외국인을 지칭하는 법적 용어이다. 한곳에 머물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의미한다. 성도는 하늘의 시민권을 갖고 있는 자이기에 이 땅에서의 일시적 삶에 큰 미련을 두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성도들이 많은 오해를 받은 이유는, 로마 황제의 명령을 거역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AD64년에 로마에 일어난 화제의 주범을 그리스도인으로 몰아서 박해를 가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악으로 맞대응 하지 말고 선으로 대하며 하늘나라 시민권자 다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권면한 것이다.
사도바울이 배설물로 여긴 것들을 간간히 부러워하고 추구하는 마음들, 이 땅에서 누려야 하는 최소한의 기준을 나름 세워 놓고 타인에게는 숨겨놓은 마음들, 부정과 거짓에 동조하고 선동하는 마음들, 이기적이 계산이 세워진 행보들을 모두 내려놓고, 정직하게 하나님 앞으로 가는 천국 시민으로 살아야 한다. 모든 시선이 본향이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국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놀랍고 위대하다.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고,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며,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고 다시 저주가 없고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계22:1-5)
이 땅의 가치로 여겨지는 것들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순결하고 거룩한 이름들이 가득히, 하나님의 영광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 천국, 영원한 우리의 본향이다.
세상의 모든 삶을 다 부정하고 나쁜 것으로 규정짓는 것이 아니지만, 세상의 것들은 하나님 나라에 상반되는 것들이 많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늘나라에서는 무용지물이고 무가치한 것들인데,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은 우리가 거기에 마음을 둔다면 이율배반이고 모순이 된다. 거룩한 땅을 분배받는 그날까지, 하나님 앞에 더 정직하기를 다짐해 본다.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 우리 집을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고 기쁘기를, 더 그리움으로 가득하기를 소원한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