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469
개보다 못한 나 폰보다 못하신 예수님
주인을 향한 개들의 충성과 기다림은 특별하다. 개를 키우는 주인이 집에 CCTV를 설치하고 온종일 집안을 관찰했다. 개는 문 앞에 앉아 기다리다 주인의 침대에 올라가 벗어놓은 옷과 이불에 얼굴과 몸을 비비고,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남겨진 주인의 냄새를 맡고 다시 돌아와 문 앞에 엎드려 종일 주인을 기다렸다. 드디어 주인이 돌아오자 길길이 뛰며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얼굴을 핥고 어디로 가던 착 달라붙어 떠나지 않는다. 먹이 때문만은 아닌 다른 이유가 있다. 자신을 사랑하고 보호하고 함께해주는 주인이 고맙고 반가운 까닭이다.
그래서 나를 보니 개만도 못한 것이 맞다. 나의 주인이시고, 나의 구세주, 나의 왕, 나의 가장 절친, 나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애타게 기다리지 않았다. 그렇게 그리워하지도 사모하지도 않았다. 예수님의 향기를 맡기 위해 예수님의 남긴 자취를 따라 거기에 얼굴과 몸을 비비지도 않았고, 그분이 다시 들어오실 문 앞에 엎드려 무슨 주인의 소리가 날까 귀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냥 바쁘게 살았다. 습관처럼 타성에 젖어 살았다. 위안이 있다면 주의 일을 하고 있다는 한 가지였다. 주님에 대한 그리움이나 사모함은 별로 없다. 그러니 주님께 딱 달라붙어 그분의 열매를 맺는 일은 요원하다. 그저 내가 노력하고 내가 맺히는 자기 의의 열매일 뿐이다. 거기에 무슨 능력과 신비가 있을까. 개보다 못난 나다.
이 시대 모든 사람이 결코 놓지 않고 품에 꼭 갖고 다니는 것은 핸드폰이다.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 한순간도 멀리 두지 않는다. 화장실에 갈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잘 때도, 심지어 예배 중에도 폰은 주머니든 가방 속이든, 어디든 가장 가깝게 있다. 산책 운동 중에 한 통의 전화가 안 와도 항상 갖고 나간다. 그러다 어느 때든 ‘딩동’ 소리에 민첩하게 반응한다. 누구는 샤워 중에 폰 알림이 나자 뛰쳐나가다 미끄러져 팔이 부러졌다. 잠들기 전까지 쳐다보고 일어나자마자 폰을 찾는다. 그야말로 폰 신(God)이다. 그런 충성도 사랑도 없다. 그 속에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예수님을 그 반이라도 가까이 모시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조금 더 열심을 내어 주님을 폰처럼 항상 의식하고 무슨 소리가 날까 무슨 말씀을 하실까 귀 기울이면 깜짝 놀랄 변화가 시작된다. 그동안 안타까움으로 기다리셨던 주님께서 기쁨에 겨워 마구 부으시는 은총이다. 주님의 나무에 딱 달라붙어 진액을 빨아들인 가지에 맺게 하시는 열매들이다. 무엇보다 주님 영광의 빛을 비추시어 숨어 있던 어둠을 드러내고 즉각적으로 회개하여 씻게 하신다. 그런 오물들을 품고 주님을 폰처럼 함께 품을 순 없는 까닭이다.
주님을 품고 주님을 갖기 시작하면 가졌던 것들이 무가치해지고 버리고 싶어진다. 형식적이 아닌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시작되면 세상의 화려한 명성들도 초라해진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광채가 그분에게서 비치기 때문이다. 더욱이 가장 든든한 것은 어떤 일이든, 시간이 아까운 단순하고 지루한 일이어도 더는 속상하지 않게 되는 일이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도 일지 않는다. 외로움은 오직 주님이 숨으실 때뿐이다. 그밖에는 항상, 언제나 다정한 대화가 있고 함께 나눌 착하고 진실하신 친구가 계신 까닭이다.
개보다 못난 내가 폰보다 못하게 되신 주님을 다시 찾는다. 그리고 점점 온 세상 온 우주보다 더 위대하신 주님과 만나 천사도 부러워할 하나님 자녀요, 주님의 신부가 될 꿈을 꾼다.
박상태
주인을 향한 개들의 충성과 기다림은 특별하다. 개를 키우는 주인이 집에 CCTV를 설치하고 온종일 집안을 관찰했다. 개는 문 앞에 앉아 기다리다 주인의 침대에 올라가 벗어놓은 옷과 이불에 얼굴과 몸을 비비고,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남겨진 주인의 냄새를 맡고 다시 돌아와 문 앞에 엎드려 종일 주인을 기다렸다. 드디어 주인이 돌아오자 길길이 뛰며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얼굴을 핥고 어디로 가던 착 달라붙어 떠나지 않는다. 먹이 때문만은 아닌 다른 이유가 있다. 자신을 사랑하고 보호하고 함께해주는 주인이 고맙고 반가운 까닭이다.
그래서 나를 보니 개만도 못한 것이 맞다. 나의 주인이시고, 나의 구세주, 나의 왕, 나의 가장 절친, 나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애타게 기다리지 않았다. 그렇게 그리워하지도 사모하지도 않았다. 예수님의 향기를 맡기 위해 예수님의 남긴 자취를 따라 거기에 얼굴과 몸을 비비지도 않았고, 그분이 다시 들어오실 문 앞에 엎드려 무슨 주인의 소리가 날까 귀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냥 바쁘게 살았다. 습관처럼 타성에 젖어 살았다. 위안이 있다면 주의 일을 하고 있다는 한 가지였다. 주님에 대한 그리움이나 사모함은 별로 없다. 그러니 주님께 딱 달라붙어 그분의 열매를 맺는 일은 요원하다. 그저 내가 노력하고 내가 맺히는 자기 의의 열매일 뿐이다. 거기에 무슨 능력과 신비가 있을까. 개보다 못난 나다.
이 시대 모든 사람이 결코 놓지 않고 품에 꼭 갖고 다니는 것은 핸드폰이다.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 한순간도 멀리 두지 않는다. 화장실에 갈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잘 때도, 심지어 예배 중에도 폰은 주머니든 가방 속이든, 어디든 가장 가깝게 있다. 산책 운동 중에 한 통의 전화가 안 와도 항상 갖고 나간다. 그러다 어느 때든 ‘딩동’ 소리에 민첩하게 반응한다. 누구는 샤워 중에 폰 알림이 나자 뛰쳐나가다 미끄러져 팔이 부러졌다. 잠들기 전까지 쳐다보고 일어나자마자 폰을 찾는다. 그야말로 폰 신(God)이다. 그런 충성도 사랑도 없다. 그 속에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예수님을 그 반이라도 가까이 모시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조금 더 열심을 내어 주님을 폰처럼 항상 의식하고 무슨 소리가 날까 무슨 말씀을 하실까 귀 기울이면 깜짝 놀랄 변화가 시작된다. 그동안 안타까움으로 기다리셨던 주님께서 기쁨에 겨워 마구 부으시는 은총이다. 주님의 나무에 딱 달라붙어 진액을 빨아들인 가지에 맺게 하시는 열매들이다. 무엇보다 주님 영광의 빛을 비추시어 숨어 있던 어둠을 드러내고 즉각적으로 회개하여 씻게 하신다. 그런 오물들을 품고 주님을 폰처럼 함께 품을 순 없는 까닭이다.
주님을 품고 주님을 갖기 시작하면 가졌던 것들이 무가치해지고 버리고 싶어진다. 형식적이 아닌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시작되면 세상의 화려한 명성들도 초라해진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광채가 그분에게서 비치기 때문이다. 더욱이 가장 든든한 것은 어떤 일이든, 시간이 아까운 단순하고 지루한 일이어도 더는 속상하지 않게 되는 일이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도 일지 않는다. 외로움은 오직 주님이 숨으실 때뿐이다. 그밖에는 항상, 언제나 다정한 대화가 있고 함께 나눌 착하고 진실하신 친구가 계신 까닭이다.
개보다 못난 내가 폰보다 못하게 되신 주님을 다시 찾는다. 그리고 점점 온 세상 온 우주보다 더 위대하신 주님과 만나 천사도 부러워할 하나님 자녀요, 주님의 신부가 될 꿈을 꾼다.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