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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거지 나사로가 된 사람들
주일 아침, 아이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시간은 늘 긴장된다. 몇 안 되는 아이들이지만 언제 어떤 반응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고학년이 되면서 신앙에 대한 의심과 궁금증이 많아진 한 아이는 요즘 내 고민거리다. 아이가 교회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무엇보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싶어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설교 중에 아이가 생각지 못한 질문을 했다. “예수님을 믿었는데 이 땅에서 부자처럼 산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순간 당황했지만, 아이에게 좋은 질문을 했다며 예수님을 믿었다면 천국에는 가겠지만 큰 상급은 받지 못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하지만 예배가 끝난 뒤에도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물 한 방울만이라도 달라고 하자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했다. “얘 너는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눅16:25)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단순히 천국과 지옥을 구분하는 진리를 넘어 중요한 영계의 원리를 가르쳐 주셨다. 바로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현세의 삶이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것은 물론, 모든 성도가 천국에서 동일한 위로와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 육신적인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며 살다가 죽어서는 영생의 나라에서 온갖 행복을 차지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이 땅에서 주를 위해 고난을 받은 그리스도인과 육신의 쾌락을 좇은 성도가 누리는 위로와 축복은 전혀 같지 않을 것이다.
이 진리를 일찍이 깨닫고 이 땅에서 스스로 나사로가 된 사람들이 있다. 이용도 목사님은 1900년대 초 최고의 부흥사였지만 성도들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누추한 모습으로 다녔다. 그는 이렇게 외치고 다녔다. “오! 형제여 육에 죽고 영에 살자. 지(地)에서 천(賤)하고 천(天)에서 귀(貴)하자! 우리 주님의 밟으신 길이니라.” 그는 성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을 때면 주리시던 주님을 생각하며 울었다. 따스한 방에 누울 때 머리 둘 곳 없으신 주님을 기억했으며, 좋은 의복을 얻을 때 수의 한 벌도 없이 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생각했다. 굶어 죽는 형제를 보면서도 배불리 먹고 감사기도를 올린다면 그 감사는 망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오,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옵소서. 나로 하여금 차라리 감사하는 자가 되지 않고 죄송을 느끼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내가 먹을 때 먹는 나를 기뻐하여 감사하지 않고, 먹지 못하는 친구들과 슬퍼하여 우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로마의 거지’로 불리는 분도 요셉 라브르는 세상에 살면서 쾌락을 버리고 청빈을 실천하는 순례자의 삶을 살기로 결단한다. 프랑스, 스페인,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에 있는 성지들을 순례하는데 맨발로 구걸하면서 기도와 찬양 중에 걸어갔다. 어디를 가나 항상 길거리에서 밤을 보냈으며 바람과 비를 맞아 의복이 다 떨어졌어도 그것을 갈아입으려고 하지 않았다. 누더기를 입고 더러운 몸으로 문전걸식하면서도 약간의 돈이라도 얻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말수가 적은 대신 기도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사람들의 냉대마저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그를 보며 사람들은 ‘성자 거지’라고 불렀다. 1774년부터 로마에 머물던 그는 낮에는 성당에서 기도하고, 밤에는 콜로세움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건강을 많이 해치게 되었다. 결국 그는 1783년 4월 17일 고난주간 성당에서 허물어지듯 쓰러진 후 어느 푸주한의 집에서 임종을 맞았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복된 위로를 누릴 또 한 명의 나사로가 탄생한 날이었다.
내게도 더 좋은 부활을 갈망하던 때가 있었다. 천국에서의 처소가 각각 다르다면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가까이에서 영원토록 살고 싶었다. 아주 많이 잠시였지만 먹는 것보다 금식하는 것이 즐겁고, 칭찬을 받으면 괴롭고 무시를 받으면 주님을 닮는 것 같아 즐거웠다. 하지만 육적인 생활은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젖어 들었다. 어느 샌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고민하며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고 있었다.
좀 더 맛있는 음식을 구하고, 재미있는 일을 찾고 있었다. 그것이 풍요로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숙명이라 생각했다. 나사로가 아닌 부자의 삶을 추구하고 있으면서도 천국의 축복을 놓치기 싫어 영적인 욕심도 부려봤지만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는 없었다.
성도가 이 땅에서 먹고 마시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곳이 아니다. 단지 즐겁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기에는 나의 영혼이 보다 높고 깊은 것을 갈망하고 있다. 비록 육신의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나일지라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고, 더 좋은 부활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땅과 천국 모두 폼나게 살아보려는 욕심을 버리자. 지금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복된 위로를 누리는 자들은 이 땅에서 스스로 거지 나사로의 길을 갔음을 잊지 말자.
박하영
주일 아침, 아이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시간은 늘 긴장된다. 몇 안 되는 아이들이지만 언제 어떤 반응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고학년이 되면서 신앙에 대한 의심과 궁금증이 많아진 한 아이는 요즘 내 고민거리다. 아이가 교회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무엇보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싶어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설교 중에 아이가 생각지 못한 질문을 했다. “예수님을 믿었는데 이 땅에서 부자처럼 산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순간 당황했지만, 아이에게 좋은 질문을 했다며 예수님을 믿었다면 천국에는 가겠지만 큰 상급은 받지 못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하지만 예배가 끝난 뒤에도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물 한 방울만이라도 달라고 하자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했다. “얘 너는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눅16:25)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단순히 천국과 지옥을 구분하는 진리를 넘어 중요한 영계의 원리를 가르쳐 주셨다. 바로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현세의 삶이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것은 물론, 모든 성도가 천국에서 동일한 위로와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 육신적인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며 살다가 죽어서는 영생의 나라에서 온갖 행복을 차지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이 땅에서 주를 위해 고난을 받은 그리스도인과 육신의 쾌락을 좇은 성도가 누리는 위로와 축복은 전혀 같지 않을 것이다.
이 진리를 일찍이 깨닫고 이 땅에서 스스로 나사로가 된 사람들이 있다. 이용도 목사님은 1900년대 초 최고의 부흥사였지만 성도들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누추한 모습으로 다녔다. 그는 이렇게 외치고 다녔다. “오! 형제여 육에 죽고 영에 살자. 지(地)에서 천(賤)하고 천(天)에서 귀(貴)하자! 우리 주님의 밟으신 길이니라.” 그는 성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을 때면 주리시던 주님을 생각하며 울었다. 따스한 방에 누울 때 머리 둘 곳 없으신 주님을 기억했으며, 좋은 의복을 얻을 때 수의 한 벌도 없이 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생각했다. 굶어 죽는 형제를 보면서도 배불리 먹고 감사기도를 올린다면 그 감사는 망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오,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옵소서. 나로 하여금 차라리 감사하는 자가 되지 않고 죄송을 느끼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내가 먹을 때 먹는 나를 기뻐하여 감사하지 않고, 먹지 못하는 친구들과 슬퍼하여 우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로마의 거지’로 불리는 분도 요셉 라브르는 세상에 살면서 쾌락을 버리고 청빈을 실천하는 순례자의 삶을 살기로 결단한다. 프랑스, 스페인,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에 있는 성지들을 순례하는데 맨발로 구걸하면서 기도와 찬양 중에 걸어갔다. 어디를 가나 항상 길거리에서 밤을 보냈으며 바람과 비를 맞아 의복이 다 떨어졌어도 그것을 갈아입으려고 하지 않았다. 누더기를 입고 더러운 몸으로 문전걸식하면서도 약간의 돈이라도 얻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말수가 적은 대신 기도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사람들의 냉대마저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그를 보며 사람들은 ‘성자 거지’라고 불렀다. 1774년부터 로마에 머물던 그는 낮에는 성당에서 기도하고, 밤에는 콜로세움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건강을 많이 해치게 되었다. 결국 그는 1783년 4월 17일 고난주간 성당에서 허물어지듯 쓰러진 후 어느 푸주한의 집에서 임종을 맞았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복된 위로를 누릴 또 한 명의 나사로가 탄생한 날이었다.
내게도 더 좋은 부활을 갈망하던 때가 있었다. 천국에서의 처소가 각각 다르다면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가까이에서 영원토록 살고 싶었다. 아주 많이 잠시였지만 먹는 것보다 금식하는 것이 즐겁고, 칭찬을 받으면 괴롭고 무시를 받으면 주님을 닮는 것 같아 즐거웠다. 하지만 육적인 생활은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젖어 들었다. 어느 샌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고민하며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고 있었다.
좀 더 맛있는 음식을 구하고, 재미있는 일을 찾고 있었다. 그것이 풍요로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숙명이라 생각했다. 나사로가 아닌 부자의 삶을 추구하고 있으면서도 천국의 축복을 놓치기 싫어 영적인 욕심도 부려봤지만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는 없었다.
성도가 이 땅에서 먹고 마시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곳이 아니다. 단지 즐겁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기에는 나의 영혼이 보다 높고 깊은 것을 갈망하고 있다. 비록 육신의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나일지라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고, 더 좋은 부활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땅과 천국 모두 폼나게 살아보려는 욕심을 버리자. 지금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복된 위로를 누리는 자들은 이 땅에서 스스로 거지 나사로의 길을 갔음을 잊지 말자.
박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