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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독서| 의미없는 고난은 없다 |마르바 던
큰 나무의 껍질은 단단하고 거칠다. 나무의 피부가 갈라져 터지고 상처를 입으면서 굳은살이 박인 흉터이다. 연하고 부드러운 나무줄기의 피부가 자라면서 갈라져 터지고 굳은살이 박여 누구라도 그 나무껍질을 흉터라고 여기지 않을 만큼 멋지게 자라난 것이다. 나무껍질은 아픔의 과정에서 자신의 피부나 상처받는 상황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봄이 되면 솟아날 새순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멋진 나무껍질을 갖게 되었다.
고난은 결과가 아니라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다. 고난의 과정을 통해 주님의 선하신 뜻을 바라보며, 기쁘게 받아들임으로써 성장하고 성숙하는 은혜를 입는다. 또한 고난은 주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잠잠히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약1:4)는 말씀은 ‘겸손히 환자가 돼라’라는 주님의 음성이다. 누구도 환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겠지만, 환자(patient)가 되는 것이 인내하는(patient) 것임을 알 수 있다.
영성 신학자 마르바 던은 어렸을 때 앓은 홍역 바이러스 때문에 55년 동안 당뇨를 앓고 있어 신장은 25%밖에 기능하지 못한다. 신장을 이식받은 후로는 정해진 시간에 하루 11번 약을 먹어야 한다. 합병증으로 한쪽 눈은 보이지 않으며 장 중첩증으로 인한 장 절제와 자궁 적출, 여러 조각으로 부서진 발뼈를 맞추는 수술, 암 수술을 두 번 받았다. 다리는 불구이고, 뼈는 퇴행하고 무릎 아래로는 신경이 죽었기 때문에 걷지 못한다. 암 수술을 받을 때 신경이 손상되었고, 또 관절염이 있어서 늘 고통스럽다. 평생 이렇게 심각한 병고를 지고 살아가지만, 마르바 던은 '병중에도 건강하게' 살아야 할 이유와 방법을 성경에서 찾고, 거기서 찾은 온전함과 희망을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로 풀어냈다.
책은 ‘상실과 수확’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아니면 살다가 신체적, 영적, 사회적, 정서적 상실을 맞을 수 있다. 삶의 어떤 요소는 한 번 잃으면 이전 상태로 회복할 수 없다. 이때 절망이 안에 쌓여 우울감에 빠지지 않으려면 상실의 비애를 인정하고 충분히 슬퍼해야 한다. 동시에 여러 모양의 강력한 치유를 경험할 수 있다. 치유는 자신과 타인 그리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로 이끈다. 상실에서 얻는 수확이다. 그러나 상실이 거듭될수록 하나님의 부재가 더 확실하게 보이는 영적 무기력과 공허감에 빠진다. 이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시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훈련기간이다. 진리는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고, 끊임없이 우리를 용서하시며, 넘치는 은혜와 풍성한 자비로 보살펴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회의를 다루는 과정 자체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지는 방법으로 사용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느끼는 것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강조한다.
저자는 남아 있는 눈마저 실명하지 않을까, 한쪽 귀의 청력을 부분 상실한 것처럼 반대쪽 귀도 언젠가는 그리되지 않을까 등. 염려와 근심, 절망과 낙심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하나님은 이사야서를 통해 말씀하신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49:15-18)
예루살렘 성벽이 항상 우리 앞에 있는 것처럼 우리 개개인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구주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다. 우리를 위해 엄청난 값을 치르신 분이 우리를 잊으실 리 만무하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은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
마르틴 루터는 우리가 “으깨져 형체가 없어져야만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져 그리스도만이 우리 안에 계실 수 있다”라고 했다. 책의 후반부로 가면 날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과 세상을 위해 살기 위해 자아에 대해 죽는 법을 배워야 함을 서술한다. ‘마지막’이라는 그리스 단어 에스카톤(eschaton)은 종말을 뜻하는데 저자는 종말을 이중적 의미로 표현했다. 미래의 측면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요, 현재의 측면에서는 하나님 나라 안에 살면서 그 나라가 심령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소망 속에서 욕심과 하찮은 계획에 대하여 날마다 죽을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목적에 온전히 참여하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상실을 통해서 깨달은 하나님의 무한성과 인간의 유한성을 생각하며 4가지 답을 얻는다.
첫째, 장애 때문에 인생이 짧을 것을 알았기에 남은 시간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에너지를 남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며 사는 것이다.
둘째, 상실을 통해 인생무상을 절감하며 배운 교훈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다.
셋째, 상실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합당한 자로 빚으신다.
넷째, 인생은 잠깐 지나가는 것이기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을 향해 저자는 말한다.
“신체적 상실에 대한 이 고찰이, 망가진 자기 몸을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보살피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내가 겪어온 여러 장애와 병고를 바탕으로 이 글을 쓴다. 시편 기자가 그랬듯이 우리 모두 하나님께 부르짖을 줄 알았으면 좋겠다. 병고 속에서 그리고 그 병고를 통해 일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 모두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박미선
큰 나무의 껍질은 단단하고 거칠다. 나무의 피부가 갈라져 터지고 상처를 입으면서 굳은살이 박인 흉터이다. 연하고 부드러운 나무줄기의 피부가 자라면서 갈라져 터지고 굳은살이 박여 누구라도 그 나무껍질을 흉터라고 여기지 않을 만큼 멋지게 자라난 것이다. 나무껍질은 아픔의 과정에서 자신의 피부나 상처받는 상황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봄이 되면 솟아날 새순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멋진 나무껍질을 갖게 되었다.
고난은 결과가 아니라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다. 고난의 과정을 통해 주님의 선하신 뜻을 바라보며, 기쁘게 받아들임으로써 성장하고 성숙하는 은혜를 입는다. 또한 고난은 주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잠잠히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약1:4)는 말씀은 ‘겸손히 환자가 돼라’라는 주님의 음성이다. 누구도 환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겠지만, 환자(patient)가 되는 것이 인내하는(patient) 것임을 알 수 있다.
영성 신학자 마르바 던은 어렸을 때 앓은 홍역 바이러스 때문에 55년 동안 당뇨를 앓고 있어 신장은 25%밖에 기능하지 못한다. 신장을 이식받은 후로는 정해진 시간에 하루 11번 약을 먹어야 한다. 합병증으로 한쪽 눈은 보이지 않으며 장 중첩증으로 인한 장 절제와 자궁 적출, 여러 조각으로 부서진 발뼈를 맞추는 수술, 암 수술을 두 번 받았다. 다리는 불구이고, 뼈는 퇴행하고 무릎 아래로는 신경이 죽었기 때문에 걷지 못한다. 암 수술을 받을 때 신경이 손상되었고, 또 관절염이 있어서 늘 고통스럽다. 평생 이렇게 심각한 병고를 지고 살아가지만, 마르바 던은 '병중에도 건강하게' 살아야 할 이유와 방법을 성경에서 찾고, 거기서 찾은 온전함과 희망을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로 풀어냈다.
책은 ‘상실과 수확’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아니면 살다가 신체적, 영적, 사회적, 정서적 상실을 맞을 수 있다. 삶의 어떤 요소는 한 번 잃으면 이전 상태로 회복할 수 없다. 이때 절망이 안에 쌓여 우울감에 빠지지 않으려면 상실의 비애를 인정하고 충분히 슬퍼해야 한다. 동시에 여러 모양의 강력한 치유를 경험할 수 있다. 치유는 자신과 타인 그리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로 이끈다. 상실에서 얻는 수확이다. 그러나 상실이 거듭될수록 하나님의 부재가 더 확실하게 보이는 영적 무기력과 공허감에 빠진다. 이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시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훈련기간이다. 진리는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고, 끊임없이 우리를 용서하시며, 넘치는 은혜와 풍성한 자비로 보살펴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회의를 다루는 과정 자체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지는 방법으로 사용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느끼는 것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강조한다.
저자는 남아 있는 눈마저 실명하지 않을까, 한쪽 귀의 청력을 부분 상실한 것처럼 반대쪽 귀도 언젠가는 그리되지 않을까 등. 염려와 근심, 절망과 낙심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하나님은 이사야서를 통해 말씀하신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49:15-18)
예루살렘 성벽이 항상 우리 앞에 있는 것처럼 우리 개개인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구주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다. 우리를 위해 엄청난 값을 치르신 분이 우리를 잊으실 리 만무하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은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
마르틴 루터는 우리가 “으깨져 형체가 없어져야만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져 그리스도만이 우리 안에 계실 수 있다”라고 했다. 책의 후반부로 가면 날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과 세상을 위해 살기 위해 자아에 대해 죽는 법을 배워야 함을 서술한다. ‘마지막’이라는 그리스 단어 에스카톤(eschaton)은 종말을 뜻하는데 저자는 종말을 이중적 의미로 표현했다. 미래의 측면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요, 현재의 측면에서는 하나님 나라 안에 살면서 그 나라가 심령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소망 속에서 욕심과 하찮은 계획에 대하여 날마다 죽을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목적에 온전히 참여하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상실을 통해서 깨달은 하나님의 무한성과 인간의 유한성을 생각하며 4가지 답을 얻는다.
첫째, 장애 때문에 인생이 짧을 것을 알았기에 남은 시간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에너지를 남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며 사는 것이다.
둘째, 상실을 통해 인생무상을 절감하며 배운 교훈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다.
셋째, 상실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합당한 자로 빚으신다.
넷째, 인생은 잠깐 지나가는 것이기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을 향해 저자는 말한다.
“신체적 상실에 대한 이 고찰이, 망가진 자기 몸을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보살피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내가 겪어온 여러 장애와 병고를 바탕으로 이 글을 쓴다. 시편 기자가 그랬듯이 우리 모두 하나님께 부르짖을 줄 알았으면 좋겠다. 병고 속에서 그리고 그 병고를 통해 일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 모두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박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