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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수실 작은 마음
내 방은 밤에는 낮과는 전혀 다른 환경이 된다. 그래서 겨울엔 난방텐트를 펴고 동굴처럼 그 속에 들어가서 잔다. 몇 해를 그렇게 지냈다. 연말에 특별한 은혜를 부으셔서 새 마음이 일어 일기를 쓰기로 했다. 한 달이 지났을 때, 그 좁은 텐트 속에서 쓰고 싶어졌다. 이내 작은 탁자를 들였다. 낮은 천장엔 주님의 십자가가 있어 고개를 세우면 부딪친다. 잠결에 눈이 떠지면, 새벽에 일어나다 부딪히면, 다시 밤이 돼 일기 쓰고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주님…’ 하고 잠을 청한다. 하룻밤에 두어 번씩은 뒤척이다 탁자에 부딪히며 십자가를 본다.
어떻게 뒤늦게 이렇게 은혜가 임할까, 죽을 날이 가까운 걸까, 그동안 내 맘대로 살아온 삶에 대한 참회의 시간을 주신 것이리라. 사실 목회하며 강의하며 여러 주님의 일을 하며 주님과는 상관없이 한 일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냥 일에 몰두하거나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한 일들이었다. 일하다 짜증도 부리고, 무례히 행하고, 제풀에 꺾여 버리기도 했다. 아무리 반성하고 회개해도 여전히 또 반복되었다. 악성은 더 커가는 듯했다. 타고난 못된 성질 탓이라 했고, 어쩔 수 없는 죄의 법칙이라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주님께 꼭 붙어있지 않은 결과였음을 알고는 아까운 시간들이 지나가버린 것에 몸서리쳤다. 그래서 또 나타나고, 또 저지르고, 계속 반복된 것 이었구나…. 그동안 달라진 것은 초등학문 수준이었고, 그것은 다른 종교에서도 일어나는 그 정도였던 것이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할 수 없는 그 정도 수준이라? 말이 되는가? 수십 년 목회, 성경말씀 연구와 증거도 그 수준이란 말인가. 도대체 기도는 무슨 힘이 있는가. 그냥 자기수도, 자기만족이었던 건가.
내가 놓친 핵심은 바로 그렇게 자주 설교했던 “주님과의 동행”이었다. 주님 없이도 그냥 할 일을 했으니, 실상 주님 없이도 사는 것 아닌가. 말씀은 이미 다 알고 있고, 하나님의 뜻-이를테면 착한 생활-같은 것도 성경의 진리를 통해 다 알고 있으니 그냥 살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니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친교도 없고, 감동도 없고, 기도도 권태로웠다. 왜 일까.
일기를 쓰며 알게 되었다. 머릿속의 지식이 아니고, 실제적인 사귐이 없었다. 주님의 임재와 동행에 대한 간절함이 없었다. 진실하게 통회하며 간청했던 그 밤에 주께서 오셨다. ‘아들아, 이제야 내게로 오느냐… 널 많이 기다렸다.’
아, 주님은 정말 사랑이시다. 그렇게 오래 참으시고 그렇게 마냥 기다려주시며 이제나저제나 눈을 돌려 주님께 고정하기를 고대하셨다. 동구 밖까지 나온 탕자의 아비처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주님.’
요즘엔 계속해서 깜짝깜짝 놀라는 일들이 생긴다. 커피를 한 방울까지 정성껏 내릴 때면, ‘기도도 그렇게 정성껏 하면 좋겠구나.’ 심방을 끝내고 빨리 달려 돌아올 때면, ‘그렇게 빨리 가서 무얼 하려느냐? 나와 함께라면 천천히 가도 괜찮지.’ 내가 제일 약한 자기정죄, 자기학대가 터질 때면, ‘나는 널 그렇게 정죄하지 않는단다.’ 무언가 감사할 때면, ‘이렇게 감사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 일에 몰두하며 열심을 내면, ‘나를 또 잊었구나. 나는 그 일보다 나를 보기 원한다.’ 그러면서 또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신다. “네가 내게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며칠 전에 궁금해져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요즘 내가 좀 변한 게 있나요?”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네… 좀 착해진 것 같아요.”
아, 주님 이런 건가요? 주님께 붙어있어야 되는 일이… ‘감사합니다. 오늘 밤에도 작은 방에서 또 뵈어요.’
박상태
내 방은 밤에는 낮과는 전혀 다른 환경이 된다. 그래서 겨울엔 난방텐트를 펴고 동굴처럼 그 속에 들어가서 잔다. 몇 해를 그렇게 지냈다. 연말에 특별한 은혜를 부으셔서 새 마음이 일어 일기를 쓰기로 했다. 한 달이 지났을 때, 그 좁은 텐트 속에서 쓰고 싶어졌다. 이내 작은 탁자를 들였다. 낮은 천장엔 주님의 십자가가 있어 고개를 세우면 부딪친다. 잠결에 눈이 떠지면, 새벽에 일어나다 부딪히면, 다시 밤이 돼 일기 쓰고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주님…’ 하고 잠을 청한다. 하룻밤에 두어 번씩은 뒤척이다 탁자에 부딪히며 십자가를 본다.
어떻게 뒤늦게 이렇게 은혜가 임할까, 죽을 날이 가까운 걸까, 그동안 내 맘대로 살아온 삶에 대한 참회의 시간을 주신 것이리라. 사실 목회하며 강의하며 여러 주님의 일을 하며 주님과는 상관없이 한 일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냥 일에 몰두하거나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한 일들이었다. 일하다 짜증도 부리고, 무례히 행하고, 제풀에 꺾여 버리기도 했다. 아무리 반성하고 회개해도 여전히 또 반복되었다. 악성은 더 커가는 듯했다. 타고난 못된 성질 탓이라 했고, 어쩔 수 없는 죄의 법칙이라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주님께 꼭 붙어있지 않은 결과였음을 알고는 아까운 시간들이 지나가버린 것에 몸서리쳤다. 그래서 또 나타나고, 또 저지르고, 계속 반복된 것 이었구나…. 그동안 달라진 것은 초등학문 수준이었고, 그것은 다른 종교에서도 일어나는 그 정도였던 것이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할 수 없는 그 정도 수준이라? 말이 되는가? 수십 년 목회, 성경말씀 연구와 증거도 그 수준이란 말인가. 도대체 기도는 무슨 힘이 있는가. 그냥 자기수도, 자기만족이었던 건가.
내가 놓친 핵심은 바로 그렇게 자주 설교했던 “주님과의 동행”이었다. 주님 없이도 그냥 할 일을 했으니, 실상 주님 없이도 사는 것 아닌가. 말씀은 이미 다 알고 있고, 하나님의 뜻-이를테면 착한 생활-같은 것도 성경의 진리를 통해 다 알고 있으니 그냥 살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니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친교도 없고, 감동도 없고, 기도도 권태로웠다. 왜 일까.
일기를 쓰며 알게 되었다. 머릿속의 지식이 아니고, 실제적인 사귐이 없었다. 주님의 임재와 동행에 대한 간절함이 없었다. 진실하게 통회하며 간청했던 그 밤에 주께서 오셨다. ‘아들아, 이제야 내게로 오느냐… 널 많이 기다렸다.’
아, 주님은 정말 사랑이시다. 그렇게 오래 참으시고 그렇게 마냥 기다려주시며 이제나저제나 눈을 돌려 주님께 고정하기를 고대하셨다. 동구 밖까지 나온 탕자의 아비처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주님.’
요즘엔 계속해서 깜짝깜짝 놀라는 일들이 생긴다. 커피를 한 방울까지 정성껏 내릴 때면, ‘기도도 그렇게 정성껏 하면 좋겠구나.’ 심방을 끝내고 빨리 달려 돌아올 때면, ‘그렇게 빨리 가서 무얼 하려느냐? 나와 함께라면 천천히 가도 괜찮지.’ 내가 제일 약한 자기정죄, 자기학대가 터질 때면, ‘나는 널 그렇게 정죄하지 않는단다.’ 무언가 감사할 때면, ‘이렇게 감사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 일에 몰두하며 열심을 내면, ‘나를 또 잊었구나. 나는 그 일보다 나를 보기 원한다.’ 그러면서 또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신다. “네가 내게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며칠 전에 궁금해져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요즘 내가 좀 변한 게 있나요?”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네… 좀 착해진 것 같아요.”
아, 주님 이런 건가요? 주님께 붙어있어야 되는 일이… ‘감사합니다. 오늘 밤에도 작은 방에서 또 뵈어요.’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