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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언어의 온도는 몇 도인가?
1월 첫 주부터 ‘살다가 가장 추운 날’이라는 앵커의 보도와 함께 전국에 한파주의보가 내렸다. 곳곳에서 수도관이 동파되어 불편을 겪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폭설도 겹쳐 몸이 한층 더 움츠려들었다. 오늘의 날씨를 검색해보니 영하 17도였다. 몸을 꽁꽁 싸매고 출근을 하려고 눈길을 조심스레 걸어가는데, 길모퉁이의 눈사람이 시선 안으로 훅 들어왔다. 분홍색 물방울무늬의 투명 우산을 씌어 놓은 눈사람이 참 정겹게 느껴졌다. 한편으로 까만 마스크를 쓴 눈사람을 보자 시대를 반영하는 듯 해 묘한 씁쓸함도 밀려왔다.
벤치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데, 5분쯤 지나자 굴다리를 통과하여 정류장으로 따복이가 진입을 하였다. 얼마 전 버스운행구간이 약간 변동되어서 “아저씨, 이 차 어느 방향으로 가나요?”라고 몇 번이나 여쭈어보았는데도 묵묵부답이셨다. 답답한 마음에 조금 더 큰 소리로 재차 되묻자 “푯말 보지 못했어요? 목감 방면으로 되어 있잖아요.”라며 신경질적으로 마지못해 답변을 하셨다. 평소에도 밝게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를 먼저 해도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던 기사분이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오늘따라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따뜻하고 복된’이라는 의미를 지닌 버스인데, 기사 분은 퉁명스럽다 못해 추운 날씨만큼이나 너무 차가웠다. 곧 이어 포동 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올라타는데, 기사 분께서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를 반갑게 하셨다. 말에도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는데, 같은 기사분임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온도가 너무나 달랐다.
이기주 작가가 쓴 「언어의 온도」에 나오는 글귀이다. “말과 글은 머리에만 남겨지는 게 아닙니다. 가슴에도 새겨집니다. 마음 깊숙이 꽂힌 언어는 지지 않는 꽃입니다. 우린 그 꽃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기도 합니다.”
텍사스 주립대 심리학과 연구진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남녀 모두 하루에 약 16,000개의 단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단어를 사용하며 말을 이어간다. 우리는 말을 통해 상대방에게 자신의 흔적을 새겨놓는다. 그 흔적이 가슴에 따스함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마음을 싸늘하게 하는 날카로운 비수로 남기도 한다. 다정한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고,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기도 하고, 말로 다친 상처가 칼에 벤 상처보다 더 깊고 오래 가는 법이다.
현시대는 코로나 팬데믹 현상으로 온도에 굉장히 민감하다. 관공서나 병원이나 음식점이나 어디에 들어가려면 출입구에서 으레 온도를 체크한다. 성전에 들어설 때도 예외는 아니다. 어디서나 먼저 체온부터 재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사무실 입구에 들어서는데 ‘내 언어의 온도는 몇 도일까?’하는 물음표가 던져졌다. 돌아보면 무뚝뚝하고 차가운 말로 주변을 얼어붙게 한 일이 참 많은 듯하다. 따뜻하고 빛 된 언어로 주변을 환하게 밝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창 정치활동을 왕성하게 하던 루스벨트는 39세 때에 갑자기 소아마비에 걸려 보행이 곤란해졌다. 그는 다리를 쇠붙이에 고정시킨 채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다. 절망에 빠진 그가 방에서만 지내는 것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던 아내 엘레나 여사는 비가 그치고 맑게 갠 어느 날 남편의 휠체어를 밀며 정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비가 온 뒤에는 반드시 이렇게 맑은 날이 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뜻하지 않은 병으로 다리는 불편해졌지만 그렇다고 당신 자신이 달라진 건 하나도 없어요. 여보, 우리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아내의 말에 루스벨트가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영원한 불구자요. 그래도 나를 사랑하겠소?” “아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해요? 그럼 내가 지금까지는 당신의 두 다리만을 사랑했나요?”
사랑이 담긴 따뜻한 말 한마디의 격려는 루즈벨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아내의 말에 용기를 얻어 장애인의 몸으로 대통령에까지 당선되었다.
1925년 6월 아프리카 중부지방 일대에는 무서운 전염병 이질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높은 열로 신음하면서 핏 똥을 줄줄 쏟다가 심하면 말 한마디 못하고 탈진해 죽어갔다. 열대지방에서의 이질은 전염의 힘이 엄청나게 강했다. 슈바이처는 원주민들에게 방역수칙을 철저하게 일러주며 손을 깨끗이 씻으라고 권면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이전 습관대로 행동하였고, 급기야 6월말이 되자 전염병들의 숫자는 더욱 늘어나 어디에도 더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크게 낙심한 슈바이처는 “내가 바보였어! 이런 야만스러운 사람들 앞에서 내가 의사가 되겠다고 나서다니…”라고 말을 하였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조수 요세프가 말했다. “선생님이 바보인 것을 이제야 아셨나요? 난 처음부터 당신이 바보라는 것을 알았다고요. 선생님 같은 바보가 없다면 이 세상에서 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어느새 요세프의 눈에도 슈바이처의 눈에도 감격의 눈물이 글썽거렸다. 낙심천만이었던 그에게 그 한 마디는 구원의 생수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후 1927년 1월 새로운 병원건물이 완성되었고, 2백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병실 외에도 특별히 전염병과 정신 지체 환자를 위해서도 따로 병실을 지을 수 있었다.
우리가 쓰는 말 한마디의 온도 차이는 엄청나다. 잠언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다고 말한다(18:21).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잠4:24) “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며”(잠16:24) 야고보 기자는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약3:2)고 했다. 말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의 인격을 판단할 수가 있다.
성 파우스티나는 말한다. “굴욕을 당하는 것이 나의 매일의 양식이다. 나는 신부가 신랑의 모든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니까 그분이 입으셨던 멸시의 두루마기를 나도 입어야 한다. 심하게 고통을 당할 때 나는 침묵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내 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 혀는 주님께서 내게 내려주신 모든 축복과 은총에 보답하고자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는 것이 그 본분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힘든 순간에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말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성만찬을 할 때, 나의 혀를 치유하시어서 내 혀가 하나님께나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없게 해 달라고 간절히 청한다. 나는 내 혀가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원한다. 혀로 범하는 죄는 참으로 크다. 자신의 혀를 다스릴 줄 모르는 영혼은 성덕에 도달하지 못한다.”
영혼의 성덕에 이르려면 자신의 혀를 잘 다스려야 한다. 남을 무시하고 비방하는 말보다는 온화하고 친절한 말로, 상대방을 세심하게 배려하며 위로와 격려의 말로 상대방을 세워주자. 퉁명스럽고 거친 교만한 말투를 버리고 자신을 낮추며 겸손한 언어를 습관화하자. 온기 있는 언어로 상대방의 슬픔을 감싸 안아주자. 때론 굴욕적인 말을 들어도 언어의 온도를 달구어 주변 사람들의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여보자. 내 언어가 이웃의 가슴에 따뜻함으로 다가가길 소망해 본다. 오늘 내 언어의 온도는 몇 도인가? 밝은 빛의 온도계로 매순간순간 되짚어보자.
이지영
1월 첫 주부터 ‘살다가 가장 추운 날’이라는 앵커의 보도와 함께 전국에 한파주의보가 내렸다. 곳곳에서 수도관이 동파되어 불편을 겪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폭설도 겹쳐 몸이 한층 더 움츠려들었다. 오늘의 날씨를 검색해보니 영하 17도였다. 몸을 꽁꽁 싸매고 출근을 하려고 눈길을 조심스레 걸어가는데, 길모퉁이의 눈사람이 시선 안으로 훅 들어왔다. 분홍색 물방울무늬의 투명 우산을 씌어 놓은 눈사람이 참 정겹게 느껴졌다. 한편으로 까만 마스크를 쓴 눈사람을 보자 시대를 반영하는 듯 해 묘한 씁쓸함도 밀려왔다.
벤치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데, 5분쯤 지나자 굴다리를 통과하여 정류장으로 따복이가 진입을 하였다. 얼마 전 버스운행구간이 약간 변동되어서 “아저씨, 이 차 어느 방향으로 가나요?”라고 몇 번이나 여쭈어보았는데도 묵묵부답이셨다. 답답한 마음에 조금 더 큰 소리로 재차 되묻자 “푯말 보지 못했어요? 목감 방면으로 되어 있잖아요.”라며 신경질적으로 마지못해 답변을 하셨다. 평소에도 밝게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를 먼저 해도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던 기사분이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오늘따라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따뜻하고 복된’이라는 의미를 지닌 버스인데, 기사 분은 퉁명스럽다 못해 추운 날씨만큼이나 너무 차가웠다. 곧 이어 포동 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올라타는데, 기사 분께서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를 반갑게 하셨다. 말에도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는데, 같은 기사분임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온도가 너무나 달랐다.
이기주 작가가 쓴 「언어의 온도」에 나오는 글귀이다. “말과 글은 머리에만 남겨지는 게 아닙니다. 가슴에도 새겨집니다. 마음 깊숙이 꽂힌 언어는 지지 않는 꽃입니다. 우린 그 꽃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기도 합니다.”
텍사스 주립대 심리학과 연구진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남녀 모두 하루에 약 16,000개의 단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단어를 사용하며 말을 이어간다. 우리는 말을 통해 상대방에게 자신의 흔적을 새겨놓는다. 그 흔적이 가슴에 따스함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마음을 싸늘하게 하는 날카로운 비수로 남기도 한다. 다정한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고,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기도 하고, 말로 다친 상처가 칼에 벤 상처보다 더 깊고 오래 가는 법이다.
현시대는 코로나 팬데믹 현상으로 온도에 굉장히 민감하다. 관공서나 병원이나 음식점이나 어디에 들어가려면 출입구에서 으레 온도를 체크한다. 성전에 들어설 때도 예외는 아니다. 어디서나 먼저 체온부터 재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사무실 입구에 들어서는데 ‘내 언어의 온도는 몇 도일까?’하는 물음표가 던져졌다. 돌아보면 무뚝뚝하고 차가운 말로 주변을 얼어붙게 한 일이 참 많은 듯하다. 따뜻하고 빛 된 언어로 주변을 환하게 밝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창 정치활동을 왕성하게 하던 루스벨트는 39세 때에 갑자기 소아마비에 걸려 보행이 곤란해졌다. 그는 다리를 쇠붙이에 고정시킨 채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다. 절망에 빠진 그가 방에서만 지내는 것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던 아내 엘레나 여사는 비가 그치고 맑게 갠 어느 날 남편의 휠체어를 밀며 정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비가 온 뒤에는 반드시 이렇게 맑은 날이 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뜻하지 않은 병으로 다리는 불편해졌지만 그렇다고 당신 자신이 달라진 건 하나도 없어요. 여보, 우리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아내의 말에 루스벨트가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영원한 불구자요. 그래도 나를 사랑하겠소?” “아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해요? 그럼 내가 지금까지는 당신의 두 다리만을 사랑했나요?”
사랑이 담긴 따뜻한 말 한마디의 격려는 루즈벨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아내의 말에 용기를 얻어 장애인의 몸으로 대통령에까지 당선되었다.
1925년 6월 아프리카 중부지방 일대에는 무서운 전염병 이질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높은 열로 신음하면서 핏 똥을 줄줄 쏟다가 심하면 말 한마디 못하고 탈진해 죽어갔다. 열대지방에서의 이질은 전염의 힘이 엄청나게 강했다. 슈바이처는 원주민들에게 방역수칙을 철저하게 일러주며 손을 깨끗이 씻으라고 권면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이전 습관대로 행동하였고, 급기야 6월말이 되자 전염병들의 숫자는 더욱 늘어나 어디에도 더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크게 낙심한 슈바이처는 “내가 바보였어! 이런 야만스러운 사람들 앞에서 내가 의사가 되겠다고 나서다니…”라고 말을 하였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조수 요세프가 말했다. “선생님이 바보인 것을 이제야 아셨나요? 난 처음부터 당신이 바보라는 것을 알았다고요. 선생님 같은 바보가 없다면 이 세상에서 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어느새 요세프의 눈에도 슈바이처의 눈에도 감격의 눈물이 글썽거렸다. 낙심천만이었던 그에게 그 한 마디는 구원의 생수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후 1927년 1월 새로운 병원건물이 완성되었고, 2백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병실 외에도 특별히 전염병과 정신 지체 환자를 위해서도 따로 병실을 지을 수 있었다.
우리가 쓰는 말 한마디의 온도 차이는 엄청나다. 잠언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다고 말한다(18:21).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잠4:24) “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며”(잠16:24) 야고보 기자는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약3:2)고 했다. 말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의 인격을 판단할 수가 있다.
성 파우스티나는 말한다. “굴욕을 당하는 것이 나의 매일의 양식이다. 나는 신부가 신랑의 모든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니까 그분이 입으셨던 멸시의 두루마기를 나도 입어야 한다. 심하게 고통을 당할 때 나는 침묵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내 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 혀는 주님께서 내게 내려주신 모든 축복과 은총에 보답하고자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는 것이 그 본분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힘든 순간에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말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성만찬을 할 때, 나의 혀를 치유하시어서 내 혀가 하나님께나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없게 해 달라고 간절히 청한다. 나는 내 혀가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원한다. 혀로 범하는 죄는 참으로 크다. 자신의 혀를 다스릴 줄 모르는 영혼은 성덕에 도달하지 못한다.”
영혼의 성덕에 이르려면 자신의 혀를 잘 다스려야 한다. 남을 무시하고 비방하는 말보다는 온화하고 친절한 말로, 상대방을 세심하게 배려하며 위로와 격려의 말로 상대방을 세워주자. 퉁명스럽고 거친 교만한 말투를 버리고 자신을 낮추며 겸손한 언어를 습관화하자. 온기 있는 언어로 상대방의 슬픔을 감싸 안아주자. 때론 굴욕적인 말을 들어도 언어의 온도를 달구어 주변 사람들의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여보자. 내 언어가 이웃의 가슴에 따뜻함으로 다가가길 소망해 본다. 오늘 내 언어의 온도는 몇 도인가? 밝은 빛의 온도계로 매순간순간 되짚어보자.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