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대는 편리하고 새로운 디지털 세상이다. 앞으로 그 추세는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심지어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영상으로 집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황이다. 하지만 영성은 철저히 아날로그다. 몸으로 훈련하며 계발해야 한다.
편리한 디지털문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문화가 사회 전반을 장악하면서 카톡, 틱톡,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유튜브, OTT, 홈페이지, 블로그, 메타버스까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의 이용자가 급증하고 있다. SNS는 사용자 간의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정보 공유, 인맥 확대 등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생성하고 강화해주는 온라인 플랫폼을 의미한다. 이런 서비스를 통해 사회적 관계망을 생성, 유지, 강화, 확장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디지털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것들이 사회 전반을 장악하면서 옛것에 대한 향수도 점점 커지고 있다. 옛것은 좀 불편하게 느껴지지만, 그중엔 정말 소중한 게 많다. 돌아보면 교회도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 많이 들어왔다. 따라 부르기도 힘든 CCM 찬양이나 성경 구절과 찬송 가사를 보여주는 스크린, 드럼과 여러 악기, 다양한 프로그램, 교회 카페 그리고 세련된 이름의 교회 조직들까지. 이미 보편화된 이런 것들은 과거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요즘 코로나 사태로 온라인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디지털 기기가 더 많이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새로운 것들이 이렇게 많은데 사람이 새로워지고 교회가 부흥되었다는 소리는 듣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운성 목사(땅끝교회)는 ‘옛것이 본질입니다’란 칼럼에서 교회는 옛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며, ‘평양 대부흥’을 한국교회 부흥의 모델로 소개했다. “한국교회가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옛것, 본질적인 것에 충실했을 때 강력한 부흥이 일어났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은 현대와 같은 새로운 게 없었다. 그저 몇 가지 본질적인 것만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뜨거운 예배, 밤새 부르짖는 기도, 통회자복 하는 회개, 멀리서 온 교인이라면 하룻밤 재워주고 음식 대접하던 신뢰에 기반을 둔 교제가 전부였다.
이런 것들은 그때 새로 등장한 게 아니라 2천여 년 전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던 가장 본질적인 것들이었다. 이런 것들이 케케묵은 구식처럼 보이겠지만, 이로 인해 교회는 교회답게 되고, 성도는 성도답게 된다. 믿음의 선진들은 옛것을 굳게 붙잡았고 그 결과 교회는 괄목할만한 부흥이 있었다. 이렇게 교회의 부흥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시작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오던 아날로그 방식의 옛것, 본질적인 것들에 충실했을 때 일어났던 것이다.
요즘 디지털을 기반으로 하는 새것들을 선호하면서 옛것은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성찰해 봐야 한다. 정규예배를 소홀히 하고 기도원과 산기도, 밤을 새우는 기도가 사라졌으며, 입술로만 하는 회개로 끝나고, 자기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이타적 사랑은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코로나 사태는 이런 관행을 부채질하고 가속화시켰다.
아날로그 영성
교회의 부흥이 새로운 것들로 안 되고 있다면 이제 옛것, 본질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아날로그 방식의 본질을 회복했으면 한다. 우리는 지금 너무 편하게 은혜를 받으려 하고 무사안일한 채 성령의 감동을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상과 마귀를 이기는 강력한 영성을 가지려면 디지털적인 정보와 지식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그것보다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몸으로 때우는 아날로그 방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내 마음을 빼앗는, SNS를 통해 역사하는 사물에 대한 애정을 과감하게 절제해야 하고, 하나님과 독대하는 기도 시간을 가져야 하고, 죄와 허물과 악습을 끊고자 하는 처절한 회개의 몸부림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다시 초대교회에서 보여주신 옛것과 본질적인 것들로 교회의 부흥을 리셋해야 하지 않을까.
요한 웨슬리가 설교했을 때 하나님의 강력한 빛이 임하여 어두움이 쫓겨나고 사회 전체가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가 한번 지나간 마을이나 도시마다 음란하고 포악한 사람들이 온순하고 겸손해지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한 번 불붙기 시작한 웨슬리의 설교는 더욱 활활 타올랐다. 그는 기성교회가 강단을 허락하지 않아 야외의 운동장·빈 창고·산·언덕에서 마이크 시설도 없이 설교해야만 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성령의 놀라운 감동으로 자신의 죄를 통회자복 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잘 차려입은 신사가 마치 죽을 것처럼 눈물로 죄를 자복했고, 수많은 이들이 바닥에 뒹굴고 울부짖으면서 강력한 은혜에 몸부림쳤다.
조지 휫필드의 설교는 거대한 불덩이 같았다. 말씀을 통해 성령의 불은 화산이 터지듯 불꽃을 뿜어내었다. 그때까지 하나님께 관심이 없었던 광부들까지도 감동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고백했다.
찰스 피니가 뉴욕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위로부터 권능이 급류처럼 사람들에게 임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심장 폐부를 도려내고 골수를 찔러, 온 회중은 죄를 자백하며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통하며 울부짖었다. 이렇게 강한 성령의 역사는 마을 전체에 임하여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충만해져 곳곳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이처럼 영적 대각성이 지나간 자리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낮고 보잘것없는 자신의 비천함을 뼈저리게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기 위한 강력한 몸부림과 아울러 실제 생활 인격에 변화가 나타난다.
우리는 영적 대각성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너무 메마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어디서 우리가 뼈가 저리는 회개와 획기적인 변화로 역사하는 초대교회의 진리를 들을 수 있으랴. ‘평양 대부흥’과 같이 무엇이 회개해야 할 죄이며, 버려야 할 어두움의 행실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성령의 역사는 어디서 일어나고 있는가.
오랜 가뭄 끝에 늦은 비를 기다리듯 타는 목마름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그립다. 우리의 신앙과 영적인 가치관에 괄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게 하라.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신학과 화석화된 교리가 아닌, 살아 역사하여 우리의 삶과 인격이 변화되도록 하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물결에 대해 단호하게 말하며 강력하게 저항할 수 있는 영성의 DNA가 활성화되게 하라.
이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