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4박 5일간의 수양회을 다녀왔다. 수양회는 세상 안에서의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고요한 곳에서 침묵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의미한다. 피정을 가는 이유는 내면의 소음이 가득할 때, 마음이 심란해지고 복잡하여 기도가 잘되지 않을 때,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며 하나님과 만남을 통해 평화를 얻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기쁘게 살아가려는 데 있다.
나 또한 분주한 일상을 떠나 조용히 하나님과 독대하고픈 마음으로 오랜만에 시간을 내었다. 첫날 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내려놓고 가장 먼저 성전을 찾았다. 피정을 시작하기 전에는 여러 가지 계획과 기도제목을 세워놓고 시간을 보내고자 했지만 성전에 앉은 순간 모든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그저 주님 앞에 머물러 있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고요한 성전에 앉아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자 그분의 임재와 함께 평안이 찾아왔다. 그렇게 5일간의 기도시간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하고 끝이 났다.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은총을 풍성히 받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 줄여서 ‘예수기도’라고도 하는 이 기도는 5세기부터 8세기 사이 동방 기독교 전통에서 생겨났는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동방과 서방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하나의 기도방법이다. ‘예수기도’라는 명칭이 암시하고 있듯이, 이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과 같은 짧고 단순한 말마디를 반복함으로써 예수님의 현존과 단순한 일치를 이루고, 고요한 빛과 평화에 이르게 해준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 이 기도에는 많은 형식이 있다.
원래 동방교회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정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여,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 기도를 간단하게 예수님이라는 한 마디로 줄였고, 이 한마디의 기도는 가장 널리 오랫동안 쓰여진 예수기도의 형태가 되었다. 소리를 내어 부르든, 마음속으로 고요히 부르든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은 우리를 마음 깊은 곳까지 이끌어줄 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을 깊은 관상 속으로 잠기게 한다.
예수기도의 가장 큰 장점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기도라는 것이다. 일터에서 업무를 하면서, 각자 방에서, 교회에서 등 어디에서든지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드릴 수 있다. 길을 걸어가면서도 계속 이름을 반복해서 부를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은 두 마음을 품은 자에게는 거하지 않으신다. 부드럽고 고요하지만,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다해 예수님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를 때 예수기도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만약 기도를 통해 강력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황홀한 체험과 엄청난 은사와도 거리가 멀다. 예수 기도는 오직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으게 한다. 그럴 때 그분의 이름은 세상의 분주함과 번잡함에 지친 우리의 마음을 쉬게 해주고 다시금 영적인 기쁨과 함께 새 힘과 능력을 얻게 해준다.
그동안 나는 넘어지고 실패할 때마다 많이 괴로워했다. ‘왜 나는 이렇게 연약할까?’ ‘왜 이렇게 부족할까?’ 하지만 나 자신을 탓하고 자책해봤자 나아지는 것은 없었고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질 뿐이었다. 피정 중 나는 이러한 연약함에서 구원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다. 며칠째 예수 기도를 계속해서 드리던 중, 속에서 깊은 갈망과 함께 애원이 터져 나왔다.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제발 연약한 저를 버리지 마시고 도와주세요.’ 수도원의 낮 기도가 시작되었는데도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엎드려 흐느끼고 있었다.
그때 한 말씀이 들려왔다. 신명기 4장 7절의 말씀이었다. “우리 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분이시다. 그처럼 가까이 계셔 주시는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어디 또 있겠는가?” 이어서 찬송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께 비는 누구에게나 주님은 가까이 계시오며, 그 애원 들으시어 구해 주시나이다.” 마침내 깊은 깨달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죄와 정욕에 빠진 것보다, 연약하고 부족한 것보다 더 큰 죄는 넘어진 그 순간에 주님을 찾지 않은 것이구나.’ 그저 예수님의 이름만을 반복해서 불렀을 뿐인데 깊은 회개와 함께 주님의 빛을 본 이날의 체험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이제 나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 그 거룩하신 이름과 함께 사는 삶이 되었다. 넘어지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넘어진 그 순간에 주님의 이름을 즉각 부를 수는 있다. 죄와 정욕에 빠지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그분의 이름 안에 거할 때 나는 다시 빛 가운데 거닐 수 있다. 그분의 존귀하신 이름과 함께라면 나의 연약함도, 환경의 어려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분의 이름은 내가 걸어갈 길이요, 영원히 거할 나의 집이다.
박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