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아도 소중한 것


두 귀를 틀어막고 곧 울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던 아이가 있었다. 반주음악으로 틀어놓은 찬양소리에 겁이 났던지 사촌 누나 뒤에 찰싹 달라붙었던 네 살 꼬마아이. 주일학교에 처음 나왔을 때 반응이었다. 몇 주 동안 유난히 찬양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한두 달이 지나자 찬양을 할 때면 소리를 꽥꽥 질러댔다. 목소리를 조금만 작게 해달라고 하면서도 마음이 살짝 불편했다. 아이의 목소리가 적잖이 예배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5살이 된 이후부터는 블록을 가지고 놀거나 소리를 지르던 아이가 곧잘 찬양을 따라 불렀다. 지금은 누나, 형들보다도 더 큰 목소리로 찬양을 따라 부른다. 매 주일 중간중간 전도사님, 저 찬양 잘 해요?”라며 질문을 꼭 던진다. 칭찬 한 마디에도 아이는 방긋 해맑게 웃는다. 글씨를 읽지 못하지만 찬양을 듣고 가사를 외워서 목청껏 찬양을 부르는 아이의 모습이 기특하고 사랑스럽다.

그간 보이는 대로 섣불리 판단했던 나의 눈이,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미처 보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함이 크다. 미련하게도 이제야 아이가 소리를 질렀던 그때도 찬양을 함께 따라 부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육안의 눈이 하나님께서 아이 안에 예비해 놓은 작은 축복의 씨앗들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보이는 것에 잘 치우치는 영적 맹인과 같은 이 죄인이, 아이들을 보이지 않는 저 아름다운 천국 길에 안내자로의 역할을 잘 할 수 있을지 요즘은 두렵기도 하다.

마지막 시간을 췌장암과 사투를 벌이면서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라는 책을 쓴 분이 계시다. 중학교 재학 중 열네 살 때 축구를 하다가 공에 눈이 맞아 실명한 후 그는 불빛조차도 볼 수 없는 완전 맹인이 되었다. 어머니도 충격을 받고 뇌일혈로 세상을 달리하였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누나는 동생을 돌본다고 봉제 공장을 다니다 과로로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결국 형제는 고아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장애인 재활원으로, 여동생은 고아원으로, 남동생은 철물점으로. 자살도 여러 차례 기도했다. 그러다 어느 목사님과 상담을 하던 중 갖지 못한 한 가지를 불평하기보다, 가진 열 가지에 감사하라.”는 말씀에 힘을 얻고 좌절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육신의 눈은 잃었지만, 영혼의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는 숱한 좌절과 고통을 딛고 연세대학을 졸업하고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가 된 그는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지냈으며, 유엔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 겸 루스벨트 재단 고문으로 7억 명에 가까운 세계 장애인의 복지 향상을 위해 헌신하였다. () 강영우 박사의 이야기다.

그는 이런 고백을 했다. “저에게 장애는 축복 그 자체였습니다. 저를 보면 어둠인데 주님을 보니 빛이었습니다. 그래서 한평생 주님만 보고 걸었습니다. 장애는 불편함일 수는 있어도 불완전함은 아닙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질병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칠흑 같은 어둠속을 살면 기분이 어떠하냐고 묻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입니다. 난 어둠속에 있지 않습니다. 늘 빛으로 가득했고, 그 빛이 너무 눈부셔서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을 뿐입니다. 선글라스를 쓰니 빛 속에 계신 이가 더욱 선명합니다. 손에 잡힐 듯하고, 보고 있으니 언제나 가슴이 뜁니다. 나의 실명은 장애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도구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희망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습니다. 제 생애는 결코 고통의 시간들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생떼쥐베리가 쓴 어린왕자에서는 여기에 보이는 건 껍데기에 지나지 않아. 가장 소중한 건 눈에 보이질 않아. 잘 보려면 마음으로 봐야지. 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어딘가에 사랑이 있기 때문이지.”라고 말한다.

소중한 건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다. 잘 보려면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한다. 어쩜 우리가 눈을 뜨기 위해서는 반대로 눈을 감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화려함에 눈이 멀어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던 롯과 같은 어두운 두 눈을, 명예와 인기와 지식과 권력을 좇다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바리새인과 같은 탐욕의 두 눈을 말이다. 보이는 것들로 판단하면 우리는 그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한다. 주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여 혹은 어리석어서 지나치는 그 순간에도 일하고 계시는 분이다. 편견과 이기심과 미움과 질투로 가득한 눈으로는 이웃들 안에 감추진 하나님의 빛도 볼 수 없고, 천국의 빛도 볼 수 없다. 세상의 것들은 주님이 오시는 그날, 산산이 무너져 내릴 큰 바벨론성에 지나지 않는다. 안개와 같은 세상의 것보다 더 소중한 영원한 것들을 사모하자.

요안느 베르니에 루비니는 말한다. “세상 것에는 장님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말아라. 그분이 원하시는 것만을 행하고, 그 밖의 모든 것들을 업신여겨라! 네 자신을 온전히 그분의 은총의 인도하심에 맡기고 성실히 따르라!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더 소중한 것들은 숨겨져 있듯, 하늘의 보화인 예수님의 생명도 감추어져 있다. 감추어진 하늘의 보화를 얻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세상의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며, 육신의 눈에 만족하는 모든 것들을 철저히 버려야 한다. 어떠한 희생을 치를지라도 말이다. 보다 더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 치르는 그 희생은 어떤 것보다 값진 것이다.

하늘의 보화는 이 세상의 크고 화려한 것들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수난의 학교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명을 얻고자 한 이들은 이 땅의 것이 아닌 모두가 고통으로 자신의 삶을 장식하였다. 우리의 삶에 가난과 실패와 멸시와 연약과 질병이 가시처럼 나를 계속 찔러대는가? 도리어 기뻐하며 감사하자. 이는 세상에 머물고 있는 우리의 시선을 하늘로 향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들인 것이다.

지금까지 보이는 것에 집착하며 웃고 울지 않았던가? 껍데기에 지나지 않은 세상의 것들을 움켜쥐고 본들 무엇하랴.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놀라운 선물들을 보지 못한다면 육신의 눈을 가진들 무엇하랴. 세상에는 눈 먼 소경이 될지라도, 하늘나라의 빛이 내 영 안에 가득 담기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이지 내 마음의 눈이 밝아져 아이들 안에 숨겨진 보석들을 하나하나 발견하며 천국 길로 그들을 잘 안내하면 얼마나 좋을까. 보이지 않아도 소중한 것을 볼 수 있는 마음과 눈이 활짝 열리기를 소망해본다. 우리가 누릴 수 없었던 구원과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천국의 소망을 주신 주님을 기대하며 오늘도 감사와 기쁨으로 한 걸음 또 나아간다.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