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도 없는

        
   

외딴 집이 자기 그림자를

길게 깔아놓고 있다

햇빛은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조심 조심 떨어지고 있다

바람도 그림자를 밀고 가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그림자 위로 굴러가던 낙엽들도

몸에 묻은 그림자를 자리에 두고 간다

빛과 그림자, 오규원

고즈넉한 풍경에 조심(操心) 가득하다. 조심은 삼가 마음을 쓴다는 . 마음을 쓰는 흔적들이 묻은 풍경이 그려지며 마음이 넉넉해지고 숙연해 지기까지 한다. 조심스럽게 배려하는 사물들의 마음이 인간인 나를 부끄럽게 한다. 조심조심 떨어지는, 밀고 가지 않고 지나가는, 그리하여 제자리에 두고 가는 조심어린 마음, 마음들. 이들에 비해 어느 순간의 인간은 없이 부족한 작은 먼지들일 뿐이다.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고, 함부로 판단하여 미워하고 비방하다 아니다 싶으면 이별을 한다. 누군가의 말을 듣기보다 내가 느껴지고 바라보는 시각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결정하여 생채기를 내고 결국엔 깊은 상처를 남긴다. 어쩌면 배려는 나에게만 하는 나는, 이기심의 끝을 보여주는 슬픈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

너는 기도할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던 주님의 길은 언제나 혼자, 홀로였다. 사람들 틈에서 홀로셨고, 서로가 주님의 일등 제자라고 외치는 그들을 떠나 혼자 기도하셨고 혼자 십자가를 묵묵히 지셨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며 고통의 절정을 향하여 부른 이름은 수많은 날들 동안 함께 제자도 누구의 이름도 아니었다. 어머니도 아니었다. 가장 쓸쓸하고 고독하게 홀로 버려지셨다. 그래서 위대한 십자가의 구원은 완성되었다.

사람을 훈련시키는 방법 중에 제일 것이 ‘혼자’ 라는 방법 같다. 사방으로 단절된 외로운 길에 홀로 남겨진 사람은 두렵고 슬퍼지게 마련이다. 의지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순간이기를, 혼자이기를 원하신다. 골방도 한적한 곳도 주님이 먼저 하셨던 영적 방법들이다. 단절의 순간에 누릴 하늘의 평화를 누려보라고 요구하신다.

산해진미를 먹고 기가 막힐 풍경을 본들, 그곳에 아무도 없는 혼자라면 즐거움은 현격히 저하된다. 나눌 사람이 없는 재미없음은 우리의 마음을 금세 시들하게 한다. 낙이 없다는 말이 이럴 사용되는 . 즐거움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군가와 말을 하고 나눔을 해야만 비로소 안심을 한다. 나누면서 공유의 기쁨과 누군가가 나의 말을 들어주고 즐거워 할때 성취감도 느낀다. 혼자 있을 때는 즐거움을 차단당하는 느낌을 받고, 함께 있으면 즐거워지는 우리는 예수님의 혼자서 누리는 즐거움에 대한 요구에 반하는 삶을 살게 된다.

어쩌면 인간은 누군가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혼자 평생 살아야 한다면 얼마 못가 죽음을 맞이할 지도 모른다. 그만큼 홀로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청소년들이 삶을 비관하여 최후의 선택을 하는 원인은, 혼자 버려진 같은 따돌림이 가장 이유다. 애인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젊은이들이 자신이 사랑했다고 하는 대상과 가족을 괴롭히고 살인까지 하는 악행을 저지르는 어처구니없는 뉴스를 접하는 것은, 버려진 두려움이 참혹한 결과다. 일자리를 잃은 장년층들이 우울증에 괴로워하는 이유는, 경제적인 두려움도 있지만 내가 누리고 나누던 공간과 속에서 함께하던 사람들과 이상 함께 없는 공허감이 크다. 노인들은 몸이 아파서 죽는 것이 아니라 외롭고 고독해서 죽는다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혼자 남겨질까봐 두려워한다.

빈들에서 걸을

엘리야는 까마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기다리며 자신을 보게 되었다. 물고기 뱃속의 요나는 어둠속에서 역시 회개하고 하나님을 만났다. 죄로 인해 부끄럽고 곤고했던 수가성의 여인은 사람들을 피해 홀로 길러 갔다가 예수님을 만났다. 사도바울의 선교행적은, 친한 동료와 헤어짐을 경험하고 세상으로 떠난 제자를 보고, 거짓과 우상과 온갖 세상술수와 비방과 맞서, 홀로 버림받고 맞으며 이루어 위대한 부흥의 역사였다. 사도요한의 쓸쓸한 밧모 섬은, 하나님의 마지막 비밀이 쓰여지는 거룩한 고립이 되었다.

성경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께서 이루어 가시는 고독한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은 고독한 자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루어가야 사명과 주님의 일을 위해 홀로 있게 하시고, 고독한 즐거움을 위해 빈들을 내어 주신다.

그곳엔 친구도 혈육도 없다. 즐거운 오락이 없고, 눈물이 말라갈 만하면 새로운 눈물을 주시어 정갈하고 맑은 영혼을 이루게 도와주신다.

마귀와 싸우기 위해 40일을 광야에서 기도 하시고, 수많은 날들을 중동의 모래바람 속에 피곤하셨을 예수님의 육체와 고단한 발을 상상해 보라.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신 뒤에는 사람들을 떠나 빈들로 나가셨던 주님의 피곤한 몸을 기억하라. 나병환자를 고친 스스로 물러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던 주님의 애씀을 잊지 말라. 주님이 계셨던 모든 곳은 언제나 혼자 고독하셨다. 그러면서 배려를 잊지 않으셨다.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기도해 달라고 했건만, 결국 잠들어 버린 제자들에게, 마음은 원이로되 육체가 약하구나 말씀하시던 긍휼의 주님.

우리가 이웃들을 대할 , 빠뜨리는 것이 주님에게서 발견된다. 마음은 원이었다는 . 빈들, 가장 쓸쓸하고 지치는 그곳에서 조차 배려와 조심스러움으로 하나님의 덕과 사랑을 실천하셨던 우리 주님. 혼내도 마땅한 순간에, 잠은 잤지만 ‘마음은 원이었을’을 제자들을 배려하신다. 죽음과도 같던 빈들에서 하늘의 은총이 풍성하게 임한다.

육체의 즐거움이 약할 영혼의 힘은 강해진다. 우리가 사는 오늘은, 하나님 앞에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야 의무로 주어진 날이다. 말할 사람들이 많고, 뜻이 통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은, 자신을 닦는 수도의 장소가 아니다. 배려와 조심성을 잃어버릴 위험이 높은 곳이다. 광야의 빈들에서 바람을 맞으며, 뜨거운 태양을 맞으셨던 주님의 고독함을 가슴에 새기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가는 마음엔, 네가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는 명령을 들을 있을 것이다. 주님 외에는 바라 아무것도 없어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견고함이 생긴다. 그런 이들이 조심조심 이웃들을 배려하고 헤아리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 시켜 간다. 견고한 고독을 사모하라. 길에 주님이 계시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