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유명 배우가 마약과 연루되어 목숨을 끊었다. 혐의가 뚜렷이 밝혀지기도 전에 난무하는 구설수를 견디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경찰 수사와 언론보도도 문제지만, 무책임한 비난과 지나친 정죄는 사람을 죽이고 자칫 공동체를 파괴하는 원흉이 될 수도 있다. 


엄격한 잣대

사람마다 약점과 숨기고 싶은 치부가 있기 마련이다. 잘못이 확인될 때까지 만이라도 기다려 주는 것은 서로를 위하는 일종에 차선의 기회이다. 설사 잘못이 확인되어 죗값을 치르더라도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어야 하고, 그 벌과 비난이 도를 넘어서지 않아야 한다. 이는 모든 실수와 허물과 잘못에도 마찬가지다. 단 한 번의 실수나 잘못, 혐의조차도 용납되지 않는 타인에 대한 엄격한 잣대는 결국 자신에게도 돌아온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그 증거다. 우리 국민의 부지런함·경제력·교육열·지적 수준·성취동기 등은 매우 높지만, 우리 사회의 행복지수는 최악이다.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최고이다. 치열한 경쟁도 문제겠지만, 경쟁이야 어느 사회나 있기 마련이니 그것만으로는 비정상적인 우리의 모순된 사회를 설명할 순 없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어떤 이유로든 경쟁에서 한번 밀리면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삶 자체가 부정당하는 것 같은 사회적 분위기이다. 그것이 대학입시나 사회적 성공이건 연예인의 인기이건, 우리는 흔히 성공의 길은 외길이라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듯하다.   

이런 압박은 절박함을 하나의 미덕으로 만들고 차선의 기회에 대한 기대는 게으르거나 심지어 부도덕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 비극적인 결과는 자신과 남에게 모질게 대해도 별로 가책을 느끼지 않고 무감각하게 만든다. 

오늘날 몰지각한 학부모들의 갑질과 교사의 권위를 일말의 가책도 없이 무시하는 아이들, 약한 학우를 괴롭히는 학폭이 끊이질 않고, 정치인들의 심각한 국론분열 현상은 그 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이제 총선을 앞두고 있으니 또 얼마나 여, 야간 막말과 비난이 난무할까 지레 염려스럽다. 

아이러니하게도 구실이 생기면 사정없이 상대를 몰아붙이는 모진 습성이 권력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는 기이한 현실이다. 대중의 인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연예인에게는 엄격하던 잣대가 권력의 몰염치 앞에서는 한없이 부드러워진다. 언론이 연예인의 일탈 혐의를 보도하는 데 들인 시간과 노력의 절반이라도 할애했다면, 그리고 대중의 판단이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았으리라.

차제에 새해도 밝았으니 보다 나은 가정·교회·사회와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는 소원과 함께 ‘모 아니면 도’만 생각하는 강박증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혹여 실수나 잘못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차선의 기회가 주는 가치를 배웠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반면교사가 될 수 있는 카스텔로의 말가리따를 소개하고 싶다. 

 

정죄보단 너그러움을

이탈리아의 마사트리비아에 속한 메톨라의 성주 파라지오는 말가리따(1287-1320)라는 딸을 얻게 된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날 때부터 곱추에다 절름발이, 소경, 추녀였기에 부모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부친은 자신의 체면을 손상한다는 이유로 딸의 출생을 극비에 붙이고 7살이 되자 차디찬 독방에 가두고 말았다. 

아이는 그곳에서 무려 13년간이나 살았는데, 예수님의 은혜로 자신의 무거운 십자가인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더 나아가 이를 통해 주님과의 일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성화될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고, 깊은 기도생활과 극기와 경건생활에 정진했다.   

그러던 20살 되던 해 부친은 수도자 지아코모의 무덤에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부친은 새벽 미명에 딸을 데리고 그 무덤 앞으로 가서 딸에게 하나님께 기적을 청하도록 기도하라고 했지만, 몇 시간째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자, 격분하면서 이참에 혹을 아예 떼버리기로 작정했다. 말가리따는 다음 날 아침이 돼서야 자신이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순간 엄청난 충격에 잠시 의식을 잃은 그녀는 사람들이 자기 부모에 대해 비난하는 소리를 듣고 얼핏 정신이 들어, 즉시 이렇게 말했다. “아니에요. 부모님은 저를 20년간이나 돌봐 주셨어요. 왜 그분들이 평생 저로 인해 짐을 져야 한단 말인가요? 지금은 제가 스스로 자립할 때이고 그것은 바로 제가 원하던 것이에요.” 

상처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아프고 오래 가는 법이다. 하지만 혼자서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자식을 버린 매정한 부모를 변호하다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그녀가 이런 환경 속에서도 자기를 부인하고 시험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처음에는 그녀도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고 부모를 원망했지만, 은혜를 체험한 이후부터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사했다. 이는 사람들의 위로보다는 자신을 위해 피 흘려주신 예수님이 훨씬 감미로운 대상이 되었고, 오랜 기간 자기 부인과 인내를 통해 주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영적인 힘이 하나둘 축적되었기에 완전히 버림받는 엄청난 불행 속에서도 원망과 증오와 비난보다는, 오히려 원수를 감싸고 변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카스텔로의 사람들은 그녀를 통해 고난 속에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진한 사랑과 온유와 인내, 겸손과 화평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멀쩡한 사람들이 오히려 그녀를 찾아와 애로사항을 상담하면서 위로와 소망을 얻었다. 그녀는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지만 원망과 증오보다는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 찬란한 빛이 되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1~3).

성경은 연약한 죄인을 가혹하게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우리 사회가 좀 더 너그러워졌으면 한다. 남의 잘못을 온유하게 권면하되 너무 몰아세우지 말자. 자기의 실수와 잘못을 반성은 하되 차선의 기회와 그 가치를 포기하지 말자. 약하고 만만한 사람이면 정죄의 돌팔매를 날리고 보는, 진실을 살피기도 전에 섣부른 판단하는 것은 바보들이 하는 짓이다.  

“비판, 비난하거나 불평하는 것은 어떤 바보라도 할 수 있고, 대다수 바보가 그렇게 한다.”(벤자민 프랭클린). 

 

섣부른 판단과 가혹한 정죄를 하지 않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너그러움과 넉넉함을 배우자. 현명해진 사람들이 많았으면 한다. 

 

이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