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4,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부터 사순절(Lent)이 시작되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경건의 모습들은 늘 아쉬움과 허전함이 남는다. 사순 절기를 통해 주님사랑을 결단하며 더 성숙한 사랑을 드리는 기간으로 삼는 계기가 되어야겠다.   

 

사순절의 규례

사순절은 초대교회 때부터 엄격하게 지켜져 왔으나 지금은 그 본래의 의미를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사순절에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뜻이기에 평소보다 더 기도와 참회, 절제, 사랑실천 등에 열심을 내야 한다

일찍이 4세기의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8주간에 걸쳐 매주 5일씩 실제 40일을 금식하였다. 예를 들면 하루에 저녁 한끼만 먹었는데, 육식도 철저히 금하는 매우 엄하게 절제생활이 지켜졌다. 평소보다 더욱 많은 구제활동을 하였으며 고행과 극기생활을 실천했다.  

그러나 초대교회 때부터 계승되어왔던 규례가 서방교회에서는 9세기 이후로 서서히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현재 가톨릭에서는 거의 형식화되었고, 개신교에서는 고난주간만 기도하고 나머지는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지내는 실정이다

이처럼 사순절의 전통이 유명무실하게 되자 죄인된 우리를 대속해주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의미는 약화되고, ‘믿고 구원받았으니 세상에서 축복받고 성공’하자는 미성숙한 신앙이 만연되었다. 자체에 사순절의 전통적인 규례를 다시 되찾고 주님께 대한 사랑이 보다 성숙해졌으면 한다

사순절에 힘써야 할 일은 기도와 묵상생활이다. 사순절의 기도는 평소와는 달리 예수님의 고난과 연관된 주제가 좋다. 가령 이용도 목사님의 기도처럼 말이다. “오! 주님, 저에게 육신의 평안과 생활의 평범을 거두어 주소서. 그리고 주께서 몸소 받으신 고난의 생활을 저도 당하게 하소서. 제가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다만 주님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소서.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직접 느끼며 주님을 더욱 생각할 수 있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고난사건을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그 안에서 나의 부족함과 부끄러운 모습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예를 들어 베드로 사도가 주님을 부인하는 장면에서, ‘아, 베드로 사도는 세 번 부인하고도 이렇게 통곡하셨구나. 그런데 나는 주님을 몇백 번 몇천 번 부인하고도 이렇게 태연하단 말인가.’ 성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철저히 절제생활을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5:24)는 말씀처럼, 절제란 온전하게 예수님을 닮기 위해 모든 육적인 애정과 욕망을 억제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을 닮고 싶은 갈망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순간순간 끊어버리는 영적 훈련이다

사순절에 너무 편하게 자는 것을 삼가자. 주님은 밤늦게까지 사람들에게 시달리셨지만,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기에(1:35), 제대로 주무시지 못할 때가 많으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나는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던 주님을 묵상하자

식생활의 절제 또한 중요하다. 아씨시의 성자 프랜시스는 일생 채식을 했는데 보통 음식에다 재를 뿌리거나 물을 부어 먹었다. 이유를 묻는 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을 잊어버릴까 그럽니다.”라고 하셨다

이처럼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비아돌로로사를 가신 주님을 생각한다면, 사순절에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으며, 어찌 편하게 잠잘 수 있으랴. 그 밖에도 현대인의 필수품이라 할 수 있는 스마트폰 사용도 절제한다면 주님께서 매우 기뻐하실 것이다. 이렇게 육적인 본능과 오락을 절제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좇으라’ 하신 주님을 더욱 사랑하기 위함이다.  

 

성숙한 사랑

절제생활과 함께 나에게 주어지는 고난을 겸허히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만큼 성숙한 사랑이다. 하나님은 좋은 일도 주시지만, 때로는 고난도 허락하신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45:7). 

성숙한 사랑은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고난 가운데 인내의 말씀을 지키면서 자아를 깨뜨리시는 연단의 섭리가 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께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니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하나님의 사랑이 심령에 부어지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줄 앎이라’(5:3-5) 하셨던 것처럼

요한 타울러(독일의 영성가 1300-1361)는 주님께 대한 성숙한 사랑을 갈망하며 오랫동안 기도했다. 마침내 응답되어 영음을 듣고 교회를 찾아갔다. 요한은 그 교회의 문턱에 누더기를 걸친 왠 거지를 보았다. 들어가면서 인사를 건네자 거지가 말했다

“아- , 안녕하냐고 저에게 물으시니 감사하기는 합니다만, 저는 오늘날까지 안녕해 보지 못한 날이 하루도 없었는걸요.” “아, 그래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굉장한 행복을 주신 것이 틀림없구려.

“예, 그렇고 말고요. 저는 당신 말대로 한 번도 불행해 본 일이 없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한다고 허풍을 떤다고 생각지는 마세요. 이것은 진정이니까요. 왜 그런가 하면 나는 먹을 것이 없을 때도, 비나 눈이 오는 날에도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를 드립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기도 하고, 때로는 저를 마구 쫓아내는 사람도 있지요. 얻어먹는다고 업신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요.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루도 불행한 날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정말 그래요. 저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드리는 데에 익숙해 있거든요.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어요.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달게 받는답니다. 하나님이 제게 가장 좋고 유익한 것을 손수 저에게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불행할 이유가 없죠.

“하! 그래요? 도대체 당신은 그런 하나님을 어디서 찾았습니까?” “침묵이지요. 저는 하나님께는 별의별 말씀을 다 드리지만, 사람에게는 침묵을 지키는 습관을 몸에 익혔습니다. 하나님과 대화함으로써 내 영혼은 평안을 발견하고 안식을 누리게 되었지요.” 타울러가 그렇게도 갈망하던 성숙한 사랑을 놀랍게도 구차하고 보잘 것 없는 거지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합한다는 믿음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성숙한 사랑이었다

이번 사순절에는 평소보다 더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면서 절제와 극기생활에 힘써보자. 그런 가운데 고난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성숙한 사랑을 주님께 드릴 수 있으리라 소망해본다.                               

 

 이상화